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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중 Oct 20. 2020

30년을 이끌어가는 어눌함과 친근함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다가 문득 

"광고 듣겠습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적당한 아날로그가 좋다. 많은 사람이 그렇다. 그래서 적당한 아날로그는 늘 뜬다. 본전 이상 다 한다. 30년이 넘은 장수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항상 적당히 떠 있는 이유다.


배철수의 음악캠프(이하 배캠)를 한동안 열심히 듣다가 박소현의 라디오로 옮겨 갔었다. 박소현의 라디오도 애청자들이 꾸미는 러브스토리가 너무나 좋은 스토리텔링이라 좋았다. 그래도 편안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운전하는 게 좋아서 퇴근 시간에는 아무래도 배캠을 더 자주 듣게 된다.


배철수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자체가 매력인 어눌함이다. 지금이야 워낙 원로이니 감히 어르신에게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결례이지만 초창기 때부터 늘 느끼는 것이 물 흐르는 듯한 유창함과 부드러움이 매력적인 다른 아나운서, 디제이들과 완전히 달랐다. 어느 한 군데 막힌 듯한 어투는 듣다가 같이 숨을 참게 되는 답답함이 있었다. 말 쉬어감이 조금 길어지면 나도 숨을 참고 가슴을 졸였다. 다음 말이 언제 나오지? 그런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그 어눌함에 프로로서의 부족함을 생각했다. 전문 방송인이 된 지 몇 년 짼데, 이제는 단순히 그룹사운드의 기타리스트만이 아닌데. 그런데 그런 어눌함과 머뭇거림을 계속 들으니 그것도 나름 괜찮아졌다. 묘했다. 이게 정이란 건가? 



오랜 세월을 비슷하게 진행한 싱글벙글 쇼의 강석은 정말 청산유수의 말솜씨가 듣기 좋다면 배철수는 ‘광고 듣겠습니다’ 같은 부족함이 오히려 재미로 다가왔다. 그 ‘광고 듣겠습니다’가 30년이 흘렀다. 오해 말자. 나는 그냥 평범한 청취자일 뿐 배캠에 엽서 한 장, 문자 한 통 보내본 일 없다. 그냥 존재감 없는 샤이 청취자일 뿐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배캠을 들으면서 배캠의 장수 비결과 좀 찌푸리면서도 듣는 비결을 몇 개 찾아냈다. 대부분 아는 이야기다.



첫째, 아날로그 감성이다. 배철수 디제이도 몇 번이나 언급했다. 요즘 아무도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종이를 팔락거리지 않는다. 전부 디지털 기기로 처리하기에 큐시트도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이고 디제이는 펜 하나 들고 진행한다. 그런데 배철수는 다르다. 여러 장의 종이를 넘겨 가며 대본 읽듯이 하나하나 읽고 진행한다. 그래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필수다. 이 사그락, 샤락, 팔랑거리는 소리가 라디오 마이크와 어울리며 참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든다. 역시 적당한 어눌함이 여기에 금상첨화다. 종이를 넘기며 약간 더듬거리듯 읽는 진행자와 종이 넘기는 소리,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약간 어눌한 그 진행자는 사실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팝 음악의 절대지존, 완벽한 일인자라는 것이다. 


둘째, 청취자에 대한 인간적인 태도이다. 역시 배철수 디제이가 직접 언급한 적이 있는데 배캠에서는 청취자들의 휴대전화 끝번호 4자리의 신청자를 부를 때 1234번으로 신청해주셨습니다, 1234번이 청해 주셨네요, 1234번 청취자분 고맙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반드시 음성지원을 스스로 곁들여야 그 맛이 살아난다.) 그런데 알다시피 배캠을 제외한 거의 모든 라디오에서 디제이는 1234님 청해 주셨네요, 1234님 사연 읽겠습니다, 1234님 고맙습니다 등 번호 뒤에 님 자를 붙인다. 우리말 높임법에서 있을 수 없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 높임은 사람에게만 허용된다.(주체, 객체, 상대 어떤 높임법에도 무생물에게 높임법을 쓰는 경우는 없다.) 어떤 경우에도 1234번 휴대폰 주인 이름이 1234는 아니기에 1234에다 님을 붙여 높일 수 없다. ‘1234 번호를 쓰시는 분’은 있어도 1234님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오로지 배철수만 정확한 용법으로 높임법을 쓰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다른 모든 라디오는 다 틀렸다. 전부 ‘커피 나오시고’, ‘요금이 할인되시는’ 격이다. 다수가 쓴다고 정확한 것은 아니다. 1234님은 분명히 틀린 표현이다. 모든 라디오는 다 잘못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1234님이라고 했을 때는 1234 번호 자체가 청취자로 생각되지만 1234번으로 청해주셨다고 하면 1234 번호를 쓰는 청취자가 따로 있다는 명확한 개념이 잡힌다. 이것은 매우 크다. 번호를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고 번호를 쓰는 사람을 명확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청취자는 1234 가 아니다. 1234 번호를 쓰는 사람이다.


셋째, 팝에 대한 친밀감이다. 특히 거장 팝 가수를 말할 때 자기보다 나이가 많으면 대부분 ‘아저씨’라고 한다. ‘앨비스 프레슬리’ 아저씨라고 하고, ‘빌리 조엘’ 아저씨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됩니까? 왜 안 되지? 나한테는 아저씬데 하면서 특유의 헤헤 거리는 웃음을 날린다. 거장들에게 대한 친근함, 팝 음악에 거리를 두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팝에 대한 거리감을 줄여주는 좋은 역할을 한다.


넷째, 앞서가는 솔직함이다. 라디오에서는 광고를 오랫동안 '전하는 말씀'이라고 했다. 광고를 광고라고 부르지 못하는 기나긴 나날이었다. 홍길동이다. 그런데 배철수 디제이는 꽤나 오래전, 남들이 다 전하는 말씀이라고 할 때 '광고 듣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남들이 광고라고 하지 못할 때 광고라고 했으니 '광고 듣겠습니다.'가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톱스타들이 배캠을 거쳐 갔다. 다 꼽지도 못하겠지만 엄청난 숫자이다. 구성원들도 보통이 아니다. 원래 실력자이지만 배캠과 더불어 더욱 이름을 날린 배순탁 작가, 김진모 음악평론가도 배캠과 윈윈 하며 배캠을 빛내고 있다. 얼마 전 빌보드에서 1위를 2주 연속으로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 방탄소년단도 배캠에서 멋진 시간을 보냈다. 들으면서 정말 국뽕이 솟으면서도 재미가 넘치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배캠을 듣는다. 매일 듣지는 않더라도 가끔 들어도 괴리감이 없는 배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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