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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중 Jan 18. 2021

문학, 글, 콜럼버스의 달걀

- 내가 문학을 하는 힘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쓰면서 몇 백 번을 고쳤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시작은 쿠바의 어부가 들려준 경험이었다. 몇 달 동안 바다에 나가 허탕만 치고 돌아왔는데 어느 날은 대물을 낚아 올렸다는 이야기. 그런데 상어가 다 먹어 버려 역시 허탕이었다는 늙은 어부의 실화는 대작가의 마음을 움직였다. 고기를 잡든 못 잡든 어부는 바다에 나가는 것이 업이고 상어에게 고기를 다 빼앗길지언정 그래도 출항한다는 의연한 마음가짐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릴 때부터 몇 번을 다시 읽은 작품은 그래서 볼 때마다 새롭다. 몇 백 번의 퇴고가 주는 완성도는 글을 쓰는 것의 무게를 이해하게 한다. 그래서 글은 함부로 쓸 수 없다. 내가 만들어낸 문장이 독자의 가슴에 남아 어떻게 작동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런 책임감이 글쓰기에 필요하다.



모아놓은 동시들을 고민 고민 끝에 출판사에 보냈다. 의외로 결과는 긍정적이었다. 보탬과 수정으로 출판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다. 구름 위에 오른 기분이었다. 십여 년의 고민과 망설임이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쉽게 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도전해볼 걸.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가 떠올랐다. 마음 졸이며 불안에 떨다 이 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스 기벤라트의 혼잣말. 이럴 줄 알았으면 일등을 해 버릴 걸.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자만이 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몇 백 번 고친다는 마음을 나도 잊지 말아야지. 첫 출판의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좋은 책을 만들어야지.



브런치에 한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다. 읽어주는 독자가 있어도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브런치 덕에 낱말을 벼릴 수 있어 내려놓으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도 망설여졌다. 좋은 소식을 얻은 덕에 다시 용기를 낸다. 손이 가는 대로 쓰는 글이 편안하다. 기분이 좋다.

욕심을 내려놓게 되니 글이 가벼워졌다.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홀가분하다. 나의 일상을 나눌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근래에 힘주어 독서를 했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김훈의 ‘연필로 쓰기’, 그리고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었다. 몇 개의 짧은 동화도 읽었다. 그리고 신춘문예에 두 군데 낙방했다. 신춘문예는 죽을 때까지 보내볼 생각이다. 고시낭인처럼 별 볼 일 없더라도 계속 글을 쓰는 마음을 다지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 보내고 떨어지고 수상작과 심사 소감을 읽는다. 그것이 성장이고 발전이다. 논란이 없지 않아도 결국 승자에게는 이유가 있다는 진리를 믿는다. 몇 백 몇 천 편의 글 중에서 가장 나았으니 승자의 위치에 선 것이다. 늘 학생들에게 승자를 존중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승자를 배워 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게 발전의 길이다. 



신춘문예는 일반인에게 문학의 꿈을 주고 문학의 가치를 보여주는 매우 좋은 제도이다. 내가 글을 쓰게 된 것도 최초의 계기가 신춘문예이다. 대학 때 우연히 읽은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이 이런 내용이었다. 설거지할 때 음식을 담았던 그릇 안만 씻으면 되는 게 아니라 그릇의 뒷면을 더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릇의 뒷면이 더러우면 그릇을 포갤 때 더러운 뒷면이 다른 깨끗한 그릇의 안쪽에 닿아 더럽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조의 끝은 이거였다. ‘어머니, 내 뒤의 허물 말해주세요.’ 글 전체의 표현이 너무나 참신하고 완성도가 높았지만 핵심은 이거다. 설거지하다가 귀찮아서 그릇의 안쪽만 깨끗하게 닦고 그릇 뒷면을 대충 닦았더니 뒷면이 다른 그릇에 묻어 같이 더러워짐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순간 무릎을 치며 ‘아, 그래서 그릇은 뒷면도 깨끗이 닦아야 하는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그릇을 사람에게 가져와 사람도 뒤가 더러우면 다른 사람을 더럽히는구나의 표현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 작은 발견, 사소한 발견이 문학적 형상화를 거치면 당당히 신춘문예 당선의 영예를 얻는 것이다. 신선한 충격이고 도전의 계기였다. 나도 이런 생각을 한 적 있었는데, 이런 것은 나도 발견할 수 있겠다, 그래서 겁 없이 도전했고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로 일상에서 발견을 찾아 헤맸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것이 글임을 깨달았기에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 글의 원문과 작가를 찾지 못했다. 구글링 능력 부족을 절감한다.)



그 후로 많은 작품을 보니 그 생각이 맞았다. 창작 동기랄까 시작은 거의 대부분 그런 단순한 발견, 그러나 남들은 무심히 보아 넘긴 것이었다. 무심히 보아 넘기는 것을 내가 잡아서 글을 만들면 글이 된다. 그리고 독자에게 보여 주면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었는데’하는 공감을 얻는 것이었다. 단순하고 명쾌한 문학의 메커니즘이다. 그래서 건방지게도 스스로 글을 쓰면서 글은 늘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생각했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내가 해보니 그랬다. 문학에서 그렇지 않은 것을 찾기가 더 어렵다. 남들이 흘려버리는 것을 버리지 않고 붙잡아서 만들면 그게 작품이 된다. 그리고 얼마나 더 잘 구성했는지가 성패의 척도가 된다. 헤밍웨이도 마찬가지다. 술자리에서 흘려버릴 어부의 무덤덤한 경험을 버리지 않고 잡아서 이야기로 빚은 것이다. 전 세계를 뒤흔든 이야기의 출발점은 그런 사소한 것이다.



엮인 이야기로 2003년에 쿠바에 갔었다. 아직도 아무나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다. 공식적으로 공산주의 국가여서 우리와 수교도 되지 않았다. 방송국 힘을 빌렸기에 무지렁이인 대학생도 갈 수 있었던 신비의 땅이다. 언젠가 다시 한번 또 가고 싶다. 하바나(아바나), ‘노인과 바다’가 태어난 헤밍웨이의 집필실이자 별장, 헤밍웨이가 모히또를 즐겼던 단골 술집을 갔었다. 전부 줄을 서서 구경하는 이름난 관광지이다. 그때는 아직 문학적 영감을 모를 때라 그렇게 큰 감흥은 없었지만 헤밍웨이 별장 앞에서 푸르게 눈부신 광활한 카리브해를 보고 있으니 누구라도 대작을 쓰겠다는 건방진 생각이 들었다. 자연은 정말 위대하다. 그리고 쿠바의 모히또는 정말 정말 맛있다. 깜짝 놀라는 맛이다. 진짜 이건 먹어봐야 아는데, 그 맛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이병헌이 조승우와 함께 몰디브에서 한 잔 하는 것도 대단하겠지만, 진짜는 감히 쿠바라고 단언한다. 비록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에서 오리지널을 맛보지는 못했지만 호텔 바의 모히또도 국내에서 맛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달콤 쌉싸름하고 청량하면서 목이 ‘화’ 하면서도 온몸을 적시는 시원함, 알맞게 싱겁고 알맞게 진하며 알맞게 달콤해서 천국의 맛, 하바나의 뜨거운 더위를 한 방에 날리는 기적의 맛. 어색하기만 했던 시가의 추억, 밤보다 별이 더 많았던 하늘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언젠가 제대로 정리해서 쿠바의 감흥을 되새기고 싶은 그 모히또. 



앞뒤도 맞지 않는 글을 쓰는 것은 오늘의 기쁨 때문이다. 내가 써두었던 발견의 산물들이 완전히 쓰레기는 아니었다는 것, 나도 수많은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과정을 흉내 낼 수는 있다는 것, 그렇지, 그렇기에 브런치도 어쨌든 합격을 한 거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기에 나는 발견을 찾아 헤맨다. 대작가인 안도현, 김훈, 김려령, 하청호, 박방희 등의 강의를 들었는데 내 생각이 최소한 틀리지는 않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들도 발견을 찾아 헤맨다고 했으니까. 이제 시작이다. 일상에 문학 하나쯤 있으면 더 풍성하고 좋을 테니까. 내 삶에 계속해서 발견이 있고 문학이 있다. 그것 하나는 자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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