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중 Mar 24. 2021

자동차, 무소유까진 아니라도

자동차는 매력덩어리다. 누구나 좋은 차를 가지고 싶어 한다. 좋은 차를 타기 위해서 무리하는 경우도 많다. 좋은 차는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말은 젊은 세대에게 거의 진리다. 나도 그랬다. 좋은 차를 타고 싶었다.

직장에 갓 들어가고 연애를 하고 할 때 차 욕심이 났다. 월급을 한 푼 두 푼 모아 국민 준중형을 거의 제로 옵션의 새 차로 장만했다. 할부 제도도 잘 몰라서 그냥 자동차 회사에서 권하는 할부로 이자도 꽤 비싸게 주고 탔다. 그래도 신차라 좋아서 조심조심 애지중지 타고 다녔다.

스크래치 하나 잔 흠집 하나도 조심하다가 일 년이 채 못되어 초보운전이라 당연히 어디 하나 긁어먹었다. 꽤 크게 긁혔는데 차와 함께 가슴에도 스크래치가 크게 남았다. 상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놈의 똥차 소리가 나오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차가 한 번 긁히고 나니 보기도 싫었다. 그전까지는 애마의 부족한 점도 애처로운 동정이 갔는데 그것도 이제 궁상으로 보였다. 하루빨리 더 좋은 차로 갈아타고 싶었다.


희한했다. 그렇게 아끼던 차가 꽤나 크게 한 번 긁히고 나니 내 마음속에서 한 번에 떠났다. 한순간에 감가상각의 최대치를 찍었고 그렇게 막 타는 차로 변했다. 그래서 내 인생 첫차에 대한 애정이 식어가면서 또 돈을 모아서 더 나은 차로 갈아타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다시 돌아봐도 한 순간이다. 그전까진 정말 애마였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자식 같이 애인 같이 아끼던 차였다.


몇 년 후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크면서 자연스럽게 가족지향적 큰 차를 가질 수 있는 정당성을 얻었다. 애마는 개뿔 하루빨리 버리고 싶던 내 인생의 준중형을 내팽개치고 중형을 건너뛰고 준대형을 굴렸다. 

준대형은 좋았다. 처음에는 아반떼- 아 준중형인데 를 타던 감으로는 운전도 못할 지경이었다. 주차장 벽을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이렇게 큰 차를 내가 운전할 수 있을까 겁이 났었다. 출근길을 벌벌 떨었다. 큰 차 아무나 타는 거 아니구나.

그러다 익숙해져서 역시 남자는 그랜저는 굴려야지, 특히 나같이 키가 180이 넘으면 당연한 거 아냐를 외쳐대며 혼자 신났다. 그런데 아이가 둘 되면서 독박 육아를 참아내던 아내가 폭탄발언, 선전포고를 했다.


"당신 차 내가 좀 탈게. 애들 둘 데리고 작은 차 불안하고 불편해."


어떻게 변명이나 핑계를 대려 해도 아내는 완강했다. 젠장 싸움이거나 각방이거나 전투 거나 냉전이거나가 눈에 보였다. 순순히 준대형의 키를 넘겨야 했다.

그리고 아내의 준소형(?)을 받았다. 십 년을 훌쩍 넘은 처녀 시절 사고차를 어디서 사기 비슷하게 당해서 끌어안은 아반떼 바로 밑의 차, 존재감도 없는 털털이를 눈물로 탔다.


그런데 어랍쇼? 서운함과 패배감, 쪽팔림도 하루 이틀이지 금방 사라졌다. 작고 귀엽고 부담 없는 차가 좋기만 했다. 여차하면 인도블록에 개구리 주차도 하고, 어디 좀 대충 주차해도 덜 미안한 부피여서 생활이 편했다. 진정한 기동성을 얻었다. 신세계였다. 경차는 아니지만 그만큼이나 편했다. 빼앗긴 대형차에 대한 아쉬움을 억누르며 겨우 탈만하다고 여겼다.

어느 날 술을 거하게 마시고 대리기사에게 키를 맡길 때 유레카를 얻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기사님은 무슨 랍비의 화신이나 문수보살쯤 되지 않았을까?

"차가 좀 낡아서 운전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핸들도 좀 비뚜니까 조심하세요."

비 오는 날 진흙도 잔뜩 묻은 발을 전혀 털지도 않고 조금도 아낌없이 준소형 조수석에 몸을 던져 넣으며 키를 건넸다. 그런데 기사님의 대답이 술을 깨웠다.


"아이구, 차 좋기만 한데요, 뭘. 차가 별 겁니까 한 대 있으면 되지."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왜 여태 생각 못했던고? 그러네. 차 그거 그까이꺼 그냥 대충 하나 있으면 되는 거였다. 구박덩어리 준소형이 달리 보였다. 그래, 한 대 있으면 되는 거니까 얘도 소중한 한 대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갑자기 없던 애정이 생겨 마누라 보듯 쓸고닦고 했지만 세월의 힘은 못 이겨 얼마 안가 차가 퍼지고 말았다. 그렇게 안녕~


그리고 키가 작지 않아서 차마 소형은 못 타겠어서 급한 마음에 중형을 중고로 한대 구했다. 그리고 또 그냥 한 대 있는 차가 되었다. 이제는 아내 차에 대한 미련도 없다. 아예 차에 대한 욕심이 없다. 대리기사님은 짬바만큼 차에 대한 도통한 철학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최근에 무슨 시승 이벤트에서 선물 준다고 일억 넘는 이탈리아 스포츠카 브랜드를 시승할 기회가 있었다. 티브이 드라마에도 많이 협찬되고 엔진 소리 멋지다고 광고도 많이 하는 그 차, 내가 광고해 본들 누가 사겠냐만 차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페라리는 아니고 포르셰도 아닌 앞에 삼지창 그려져 있는 그 차를 타게 되었다.


일억을 넘는 돈값을 하느라고 차 멋지게 잘 나갔다. 스포츠 드라이빙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신나게 느꼈다. 세상이 발아래 같고 내가 바람의 뮤즈 같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어떻습니까 사장님, 이번 기회에 좋은 프로모션으로 한 번 바꿔보시지요."

딜러의 달콤한 유혹은 솔깃했지만 나는 돈이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그 차가 별로 탐나지 않았다. 물론 엄청나게 좋았다. 광고에 나오는 그 엔진 사운드도 제로백도 구라가 아니었다. 말로 다 못할 고급차의 감흥이 엄청났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이게 뭐라고 여기에 일억을 쏟아붓나?'

그냥 한 대 있으면 되는 게 차라는, 대리기사님의 진리를 접한 뒤로 어설픈 무소유 정신이 차에 갖다 붙었다. 대단하고 멋진 차, 좋은 차, 부러워할 차지만 굳이 내가 내돈내산으로 즐겨야 할 차는 아니었다. 


다시 내 낡은 중고차의 키를 꽂아 돌린다. 열선도 없고, 패들 시프트도 없고 창문도 말썽이지만 누가 뭐래도 그냥 한 대 있고 굴러가는 차다. 무소유는 절대 아니다. 이미 있으니까. 그러나 여기에 욕심을 더 내지 않는다. 20년 가까이 차를 사고 바꾸고 굴려보니 그렇다. 아무리 새 차라도 아끼면 결국 똥 되고, 좋은 차 타도 그게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언제 어디서나 한 대만 있으면 되는 게 차인데.


돈이 없기에 신 포도일 뿐이지만 안분지족으로 생각하련다. 일억이 넘는 차도 금테 두른 것도 아니더라. 무슨 하늘을 나는 것도 아니고 길 막히는데 지혼자 뚫고 가는 것도 아니고. 지나 내나 다 차이기는 똑같은데 뭐.


 

이전 09화 문학, 글, 콜럼버스의 달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