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입맛 부전여전 스토리
나는 짬뽕을 좋아한다. 나에게는 거의 소울 푸드이다. 혈중짬뽕농도가 떨어지면 괜스레 불안하고 얼른 짬뽕국물을 수혈해야 할 것 같은 조급증이 생긴다. 꽤나 유명한 짬뽕 맛집 명소도 전국적으로 다녀봤고, 집 근처 중국집 짬뽕은 돌아가며 거의 다 먹어봤다. 그래도 짬뽕을 오래 먹어 와서 입맛을 가리는지라 맛있는 집만 찾아서 시킨다. 한 번 먹어보고 좀 아니다 싶은 집은 다시 시키지 않는다.
좋은 짬뽕은 쉽게 될 수 없다. 면발, 국물, 건더기, 온도 등 수많은 요소의 합이 맞아야 한다.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과 비슷하리라 여긴다. 퍼지지 않고 적당히 쫄깃쫄깃하며 씹는 맛이 있는 면발, 일반적으로 짬뽕하면 떠오르는 적당히 검붉고 적당히 뻑뻑한 국물, 신선한 야채가 다양하게 들어 있으면서 홍합이라 불리는 변종 조개 같은 것이 들어있거나 새우, 꽃게 등이 들어있으면 금상첨화다. 요즘은 동네 중국집도 배달 어플 덕에 경쟁시대라 가게마다 가장 값싼 일반짬뽕에도 꽃게나 새우 등 고급 재료가 들어간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마니아로서는 아주 좋은 일이다.
주말마다 오직 내 욕심으로 짬뽕을 시키니 아내는 그렇다 쳐도 아직 어린 딸아이는 입이 툭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아직 얼큰하고 칼칼한 국물을 즐기기엔 이른 나이여서 저는 치킨을 먹고 싶은데 아빠는 주야장천 짬뽕을 고집해 짜장면이나 간짜장으로만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빠가 호기롭게 탕수육 같은 별식을 자주 시켜주는 통 큰 사람도 아니고, 소시민에 짠돌이인 보통 아빠라 기껏 베푼다는 것이 “너도 곱빼기 할래?” 정도니 아직 곱빼기를 먹기엔 무리인 작은 배로서는 아빠 혼자 신나게 자기만 좋아하는 짬뽕을 곱빼기로 시켜 땀을 흘려가며 밥까지 말아먹는 꼴이 못마땅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두 여성의 눈총을 받아가며 나만의 호사를 누렸다. 가끔은 치킨을 시켜주기도 했지만 치킨이 달갑지 않은 나는 짬뽕이 눈에 아른거려 두 번에 한 번은 잘 달래 가며 결국 의지를 꺾었다.
“치킨은 뼈가 너무 많이 나와. 쓰레기 봉지가 너무 빨리 차고 냄새도 심해. 아빠가 분리수거를 하니까 치킨 뼈가 많은 날에는 힘들더라.”
이렇게 돼도 아니한 핑계를 대며 집안일을 거드는 착한 아빠 코스프레를 억지로 끼워 맞추면 아이는 좀 시무룩하다가도 이해해준다는 듯 군말 없이 짜장면에도 만족했다.
그런데 그러던 아이가 변했다.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와서 “나는 짬뽕이 싫어요!”하며 울부짖으며 절규라도 할까 내심 두려웠는데, 그게 아니라 저도 나이를 먹으면서 어찌어찌 짬뽕의 맛에 눈을 뜨고 만 것이다. “너는 짜장면 할 거지? 아니면 간짜장?”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물음에 어느 날에 “아니, 나도 짬뽕.”이라는 당연하지 않은 대답이 날아왔다. “어? 진짜? 에이, 너 매워서 못 먹어.”라는 손사래에 “아니야, 나 매운 거 잘 먹어. 급식에 더 매운 것도 먹어.”라는 용감한 도전으로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럼 절대 후회하지 말고 원망도 하지 말라는 다짐을 단단히 두고는 그래도 못 미더워 짜장면도 시키고 언제나처럼 짬뽕 곱빼기를 시켜 좀 덜어주었다. 과연 처음에는 호기로운 출발과 달리 짬뽕은 그릇에서 팅팅 불어나는데 물병의 물만 줄어드는 상황을 맞이했다. 거 봐라, 역시 아직은 무리라며 짜장면 그릇을 내밀면 혀를 내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짜장면발을 돌돌 감았다. 나는 괜히 혼자 뿌듯해져서 아이가 남긴 짬뽕도 깨끗이 비웠다. 그런 시간이 흘러가며 어느덧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내 짬뽕을 덜어주는 양이 늘기 시작했다. 더 달라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날이 생기더니 이제는 숫제 자기도 한 그릇을 온전히 즐기겠다며 짜장면 주문을 아예 생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주 부녀가 사이좋게 짬뽕에 꽂히셨네요.”
아내의 어이없다는 표정의 비아냥에도 아랑곳 않고 큰 아이는 짬뽕 그릇에 코를 박는다. 나를 닮아 땀도 많아서 휴지로는 안 돼 손수건까지 손에 말아 쥐고 이제 겨우 2학년짜리가 야무지게 면치기를 하며 국물을 들이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짬뽕에 미친 아빠 때문에 좋아하는 치킨을 포기하게 되어 오히려 짬뽕 맛을 알게 된 어린 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제는 같이 짬뽕을 즐기는 동지가 생겨 든든한 마음이 훨씬 크다. 게다가 치킨 사달라는 말에 착한 아빠 콤플렉스로 동공지진을 동반한 내적 갈등을 겪을 일 없이 당당하게 짬뽕을 즐길 수 있게 되어 대만족이다.
“짬뽕이 왜 좋아?”
“그냥, 아빠 먹는 거 보다 따라 먹어 봤는데 맛있었어.”
“무슨 맛이야?”
“글쎄, 잘 모르겠어. 근데 맛있어.”
그렇지! 짬뽕의 깊고 오묘한 맛을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지. 쫄깃탱탱한 면발과 단무지의 조화, 해물과 야채 건더기를 우적우적 씹는 즐거움,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의 희열, 마지막으로 찬밥에 국물이 스며들어 검붉게 물들고 부드럽게 부서질 때의 그 감칠맛까지, 모두 말로는 표현 못할 환상 그 자체니까. 아빠의 짬뽕 사랑을 이제야 이해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감격의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나저나 이렇게 짬뽕 맛을 일찍 깨달으면 짬뽕 먹기 전의 필수코스인 소주 한 잔의 맛에도 너무 일찍 눈 뜨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된다. 그래도 여자아인데... 아니지, 오히려 나도 빨리 술친구가 생겨 더 좋을 수도 있잖아? 딸내미와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짬뽕으로 해장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역시 짬뽕은 물보다 진하고 위대하다. 이렇게 원대한 꿈까지 꾸게 해주니 내 어찌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