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가 없으면 원조 짝퉁이 원조인 거야.
기획사 사장이 튀어나온 배를 내밀며 말했다. 얼굴에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차 있었다. 한쪽으로 올라간 입꼬리도 실룩거렸다. 사장은 내 볼을 쓰다듬으면서 이름을 유인형으로 다시 개명하라고 했다. 완벽하게 원조가 되어 보라고. 두고 봐, 미래에는 원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로봇이 대신 활동할지도 모른다고. 유인형의 로봇이라고 생각해. 어떻게든 뜨기만 하면 되지. 그다음에는 일이 알아서 풀릴 거야. 어차피 유인형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사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장이 만진 부분이 움푹 팬 느낌이 들었다. 그 부분을 쓸어 보았다. 가면은 잘 스며들어 있었다.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가족들도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아직도 애타게 찾고 있을 텐데.
상관없어. 유인형 흉내만 제대로 내면 돼.
그러다가 원조가 돌아오면요?
잠깐 이름 좀 빌린 거지. 실종된 동안 공백기 없이 대신 활동해 주었으니, 잊히지 않게 도와주는 거야.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려. 금방 믿기도 하지. 유인형도 돌아오면 너한테 고마워할 거야.
그래도 그건 사칭……
어허, 아니라니까. 그 뭐냐, 옛날이야기 중에 홍길동 여러 명 나오고 그런 거, 그런 거랑 비슷한 거지. 단어가 생각 안 나네.
분신요?
그래, 분신.
분신이라는 말에 분신자살이라는 말부터 떠올랐다. 자기 몸을 스스로 불사르면서 희생하는 것. 나도 유인형이 실종된 동안 유인형 대신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유인형이 세상에서 잊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얼굴에 붙은 가면이 근질거렸다. 콧잔등 부분을 긁었다. 그 부분에 구멍이라도 생긴 듯 잠깐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싸늘한 느낌이 지나가자 가면은 얼굴에 더 세게 달라붙었다. 정말 똑같아, 쌍둥이 같다니까. 사장이 중얼거리는 소리도 가면에 달라붙는 듯했다.
여인초 옆에 섰다. 마다가스카르가 고향인 식물이었다. 서귀포에 있는 식물원의 홀에 들어갔을 때 눈에 가장 잘 띄었다. 키가 이십 미터에 가까웠다. 선녀의 부채처럼 줄기가 길고 잎이 넓적했다. 잎의 방향이 일정해 여행자들이 나침반처럼 이용하고, 잎줄기 사이에 고인 물은 여행자들의 목을 축여 준다고 패널에 적혀 있었다. 패널에 있는 이름을 다시 보았다. 한자를 보니 여행자의 풀이라는 뜻이었다. 나그네들이 줄기에 구멍을 뚫고 빨대로 물을 마시는 장면을 상상했다.
돌돌돌,
돌연 유인형의 목에 빨대를 꽂고 피를 빠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넓은 이파리 뒤에 숨어 얼굴을 반만 내밀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노란 원피스 하나만 걸친 채였다. 식물원에서 찍는 이번 화보의 콘셉트는 ‘반(1/2)’이었다. 모든 사진을 키가 큰 식물 뒤에 숨어서 얼굴을 반만 내미는 식으로 찍었다. 생애 첫 화보였다. 몇 번이나 엔지를 냈다.
얼굴을 다 내미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허술해, 아마추어같이.
감독이 불만을 표시했다. 화보는 처음이라고 얘기하려다가 유인형의 흉내를 내려면 화보 촬영도 익숙한 것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쉬는 시간에 코디네이터가 화장을 고쳐 주었다. 온실 안에서 사진을 찍었더니 커다란 선풍기를 틀어도 가면이 금세 땀에 젖었다. 가면 위에 파우더가 새로 발렸다. 가면 위에 화장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답답해서 가면을 벗고 싶었지만 곧 얇은 화장을 한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머리카락이 붙은 것처럼 간질간질했던 느낌도 사라졌다. 코디네이터가 볼 터치를 다시 해 주면서 유인형과 점점 똑같아진다고 감탄했다. 가면이 스며든 뒤 아무도 나에게 유인형과 닮았다고 하지 않았다. 유인형과 똑같다고 이야기했다. 만족스러웠다.
갑자기 코디네이터를 시험해 보고 싶어 장난스럽게 물어보았다.
만약 유인형이 안 돌아온다면…….
예?
내가 진짜 유인형이 될 수 있을까요?
이미 그렇게 된 것 같은데요. 유인형 씨로 불리고 있잖아요.
코디네이터의 말에 빙긋 웃어 보였다. 유인형 씨, 하고 스태프가 찾는 소리가 들렸다. 유인영도, 유인형 2도, 가짜 유인형도 아니었다. 온전한 유인형이었다.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가면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땀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맑았다.
촬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까보다 사람들이 많아졌다. 촬영을 구경하러 온 관광객들인 것 같았다. 휴가철이라 가족 단위가 많았다. 그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수군거렸다. 중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보였다. 그들은 내내 큰 소리로 떠들었다.
그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선풍기의 세기를 조절하고 있는 스태프 옆에서 남자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유인형 씨와 똑같네요.
남자는 쉬는 시간에 잽싸게 와서 귓속말로 속삭였다. 매니저가 남자를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나의 손짓에 물러갔다. 남자에게 다음에는 유인형 씨라고 불러 달라고 말했다. 이어 덧붙였다.
덕분에 용기 내서 유인형 씨로 살고 있어요.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에 저만 온 건 아니랍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여인초와 조금 떨어져 있는 온실 입구에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손수건을 눈에 대고 있는 중년 여성 한 명과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중년 남성 한 명, 나를 쏘아보고 있는 이십 대 청년이 한 명 있었다. 유인형의 가족인 것 같았다.
남자의 손짓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느새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휴대폰 동영상으로 찍고 있었다. 유인형의 가족들이 나를 비난하기라도 한다면 그 영상이 인터넷에 퍼지면서 유인형으로 사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가면이 굳는 것 같았다. 입 부분이 유난히 딱딱해졌다. 웃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웃는 표정이 나오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인중을 긁었다. 유인형의 습관이었다. 인터뷰에서 난처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집게손가락을 구부려 인중을 긁는 것을 보았다. 세로로 길게 팬 곳을 세게 긁었다. 날뛰던 심장이 조금 가라앉았다.
고마워요, 고마워.
예상과 달리 유인형의 어머니는 다가오자마자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눈에서는 눈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내 딸이 돌아온 것 같아. 얼굴도, 행동도 그대로야…… 시신이라도 찾아야 안심할 텐데 아직도 흔적 하나 찾을 수 없으니…… 앞으로도 왕성한 활동 부탁해요. 티비에 아가씨가 나올 때마다 내 딸 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아.
팬들 봐서 고소 안 하는 거예요. 뭐, 팬들도 누나를 아예 못 보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보기를 원할 테니까. 대신 우리 누나가 돌아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 줘요. 원래 우리 누나 자리니까.
내 딸과 똑같긴…… 정말 똑같군요. 무서울 정도로.
가족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어딘가에서 금이 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끄드득 끄드득. 환청일 것이다. 가면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얼굴에 잘 달라붙어 있었다. 이제야 웃을 수 있었다.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촬영 현장을 구경하고 있던 관광객들도 동영상을 찍는 것을 멈췄다. 대신 나에게 다가와서 사인이나 사진을 부탁했다. 유인형이 썼던 사인을 그대로 해 주었다. 유인형의 사인은 흉내 내기 쉬웠다. 대각선으로 기울어진 글씨로 이름을 크게 휘갈긴 뒤 소녀의 얼굴을 한 인형을 옆에 그렸다. 인형은 커다란 리본까지 달고 있었다. 인형을 똑같이 그리기 위해 수백 번도 더 연습했다.
팬과 셀카를 찍어 주면서 옆을 보았다. 남자는 촬영장을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인형의 가족들도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