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할 순 있어도 머무르진 말자
나날이 익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섣부른 판단이었다. 복싱장을 가는 날, 갑작스러운 복통이 찾아왔다. 컨디션이 떨어질 때마다 찾아오는 진정한 '장기' 파업의 날이었던 것. 어쩔 수 없이 격일 유지 루틴을 깨는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했다. 운동을 다음날로 미룬다는 건 나름 부담감을 지는 일이다. 왜냐하면 다니는 복싱장에선 늘 일주일 중 한 두 번은 체력 운동을 시키기 때문. 경험에 의하면 격일을 유지해야 신상에 이로웠다. 자고 일어나면 말끔히 회복되는 우수한 몸이었다면 괜찮았을 테지만 지금의 내 몸은 하루를 불태우면 일주일이 고단해지는 바이오 리듬을 아주 잘 타는 몸이었다.
속이 불편한 와중에 괜찮을까 살짝 걱정이 됐지만 뭐 어쩌겠나 받아들여야지. 내일의 나에게 토스!
우려했던 예상은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정확히 그려졌다. 역시나 다리는 정신을 따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깨에 무언가 한 짐 지고 뛰는 것 마냥 다리가 무거웠다. 팔도 올려서 주먹도 점검. 다행히 팔과 다리는 함께 잘 움직였다. 문제는 허리인데. 허리는 아직까지 협동할 생각이 부족한 듯 보였다. 팔, 허리, 다리의 움직임이 중요하다는 복싱에서 반동분자 허리만은 대쪽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리듬을 잘 타야 한다고 여러 번 피드백을 받고 나니 '복싱은 춤을 잘 추는 사람에게 유리한 운동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살짝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태생부터 몸치인 내게 이 운동이 맞는 것인가 하는 약간의 쓸데없는 원론적인 고민과 함께 삐걱되는 몸을 움직이며 체육관을 누볐다.
복싱장 가운데에는 2개의 사다리가 그려져 있다. 사다리를 따라 다양한 다리 운동을 한다(정확한 운동명은 아직도 모르겠다). 알려주는 동작들을 보면 정확한 스텝 리듬이나 빠른 다리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서로 보인다. 코치님은 기본 연습을 끝낸 여러 사람들을 모았다. 끌려온(?) 사람들은 사다리 그림 앞에 2줄로 얌전히 서 있었다. 어떤 동작을 하면 되는지 코치님의 시범이 이어졌다. 어이고, 저게 뭐야 싶은 재빠름. 동공이 확장되고 다리에 아찔함이 몰려들었다. 예제는 한 번뿐! 휘슬 소리와 함께 일단 뛰어!
내 앞에 선 날쌘 청소년은 시범을 보자마자 차자자작 질주했다. 와, 저게 되는 거였구나.. 감탄을 흘리는 사이 주어 담을 새도 없이 차례가 돌아왔다. 잠시 호흡으로 마음을 다진 후 사다리를 바라봤다. 가자!
아아, 사다리 타기는 참담했다. 나는 1차선에서 시속 30km를 달리는 차였다. 사다리 위 교통 체증의 원인이었다. 그나마 위안인 건 내 옆에서 나보다 더 느리게 차차차 댄스를 추는 호적 메이트의 모습뿐. 모든 줄의 병목현상은 우리 남매가 벌인 일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느긋함으로 사다리 안에서 엇박의 리듬을 탔다. 가끔은 삑사리 나기도 하고 동작을 얼버무리기도 했지만 끝끝내 마지막 사다리에 도착했다.
인생을 통틀어 해본 운동 중 제일 몸에 안 붙는 운동. 복싱은 쉽게 스며들지 않는다. 여전히 다리에 자리 잡은 알은 나갈 생각이 없고 덕분에 다리는 항시 든든하다. 어쩌면 이 무게가 있어서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희망이라면 처음보단 조금 더 버틸 수 있게 됐다는 것. 어찌 됐든 자란다. 새 건전지처럼 쌩썡하게 몸을 움직이는 어린 친구들을 보면 예전처럼 운동을 금방 습득하거나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어진 점이 조금 슬프게 다가온다. 간혹 어른들이 외치던 '내가 몸은 이래도 마음을 이팔청춘이야'라는 구호가 이제야 훅 스민다. 이걸 이해하게 됐다는 사실도 갑자기 서글퍼지네.
나도 모르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비교한다. 운동도 그랬다. 과거에 비추어 '운동 신경이 있었으니까 금방 배우겠지'란 생각을 했었다. 막상 닥쳐보니? 마음만 남았더라. 지금은 폴더폰 속 스마트폰이 된 느낌. 지금은 마치 모든 최고급 아이템을 장착했던 상위 캐릭터에서 모든 아이템이 벗겨져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 캐릭터 같다. 나이가 버프였던가!
왜 안 되는지 화가 나다 조급해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상황은 참 많이 변했다고 착각하고 있다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는 당연하고 과거와 현재는 수많은 조건들의 변동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왜 과거의 나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가. 과거의 영광은 더 이상 없다. '예전엔 내가 이랬지'라는 라떼 마인드로는 잠깐의 기쁨과 늘어가는 탄식뿐이다.
다행힌 점은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 캐릭터라 아이템은 없어도 경험치는 남아있다는 것. 이 경험치로 다시 헤쳐나가면 그뿐, 과거에 잡혀 한탄하기보단 현재의 나를 지켜가기로 했다. 과거에서는 확신만을 가져오기로. 더 이상 늘어나는 슬픔이 없게, 현재의 조건에서 충실히 몸을 움직인다. 현재의 나에 맞게 조급하지 않게 운동한다.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렇구나'에 절망하지 않고, '그땐 그랬다. 나는 그렇게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이 현재를 든든하게 받쳐주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 과거를 그리워할 순 있어도 과거에 머무르지는 말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