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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니 Aug 11. 2023

복싱 일지 | #2. 양반다리 대신 무인다리

운동하며 변하는 것들



나풀거리는 종이인형이 된 지 2주 차. 정확히는 6일. 주 3회 복싱장을 가는 것만으론 아직까진 몸의 변화는 거의 없다. 몇 번 운동하고 변화를 바라는 건 날로 먹는 것 같으니 양심상 바라지 않기로. 아, 그나마 종아리에 알이 제법 안정화된 상태라 걸어 다닐만하게 됐다. 이것만으로도 괜찮다. 그나저나 매주 운동할 때마다 계속 생기는 걸 보면 그냥 품어줘야 할 알인가 싶다. 생각지도 않은 알타리라 얼떨떨하다.



기본 운동을 하고 나면 무섭게도 근력 운동이 기다리고 있다(플랭크, 사이드 플랭크, 푸시업,,, 그 이후로 여러 가지 더 있는데 버티느라 용쓰느라 매번 동작 이름을 놓친다).  근력 운동은 뭐랄까. 도장 같다. 그동안 쓰지 않은 근육들이 다음 날이면 굉장히 선명하게 드러난다. 멀쩡한 다른 근육들은 아무렇지 않은 반면 지금껏 편히 놀고 있던(?) 근육들은 벌벌 떨고 있어서 판별이 가능하다.



'그동안 무임승차한 값이다 이 녀석들아.' 속으로 외치며 근육들을 괴롭혔다. 사실은 타의로 고문 아니 훈련당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자의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모든 내게 주도권이 있어야 의욕이 생기니 말이다.

지옥의 하체 운동이 끝나고 골반 근처 아랫배가 쿡쿡 쑤실 때도, 그저 융털이 좀 놀랐을 뿐이라며 도닥였다. 그렇게 훈련은 계속 흘러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운동을 체계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 의자와 물아일체로 산 지 십여 년. 뛰지 않은 양반처럼 살아온 지 십여 년이었다. 그러니 내 다리엔 걸을 수 있는 최소한의 근육만 있을 밖에.

첫 주엔 줄넘기 3세트에 땀을 비 오듯 쏟았다. 운동 2주 차엔 다행히 적응이 된 모양인지 첫 주만큼 힘들진 않았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과 접촉이 불편해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거기에 따라오지 않는 몸과 체력은 내 마음을 더 부정적으로 만들었다. 다행히 조금 암울했던 전 주와 달리 이번 주는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여전히 쭈뼛이 긴 했지만 '목표에 대한 집중'이란 생각 변화 더불어 환경이 적응이 되니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지. 아주 조그만 가능성에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니. 마음의 변화만큼 움직임에도 탄력이 붙어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다. 뭐, 복싱에 대한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줄넘기 하난 잘한다는 칭찬.  

전체 중에 하나만 잘해도 용기는 생긴다. 그렇더라. 더 중요한 것, 완벽하게 전부 잘해야 용기가 생길 거라 여겼다. 예전엔 그랬다. 아니 아주 최근까지도. 아주 작은 부분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내 기준에선 여러 부분이 부족해 보였으므로 전부 다 괜찮아야 안도했다.



모든 것을 만족시키기 얼마나 어려웠던지. 나는 자주 포기했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부족해. 그리고 그 부족함 들은 할 수 있는 용기를 잃게 만들었다. 내 약점을 굳이 바라보고 싶지 않았고 잘하는 것만 하고 싶어 했다. 이런 자세는 운동할 때 여실히 드러났다.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힘 있게 손을 뻗지 못했고 자주 멈췄으며, 흐느적거리며 안 되는 동작은 하는 듯 마는 듯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대충대충 병의 근원은 나의 불완전함을 못 받아들이는 완벽주의였다. 운동을 하다 알게 된 건지, 알고 있던 것이 운동을 하며 드러난 건지 모르겠지만. 이 인지만으로도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아직까지 그만두지 않았고  '뭐 하나라도 잘한다니 다행이네요.' 답변했을 만큼. 아주 작은 성취에도 지속할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성취였다.






복싱을 시작한 후 제일 많이 바뀐 건 태도 같다. 그것도 학습 태도. 그렇게 중요하다고 해도 재미없다고 하지도 않았던..! 복습을 하게 됐다. 나름 성실한(?) 학생이었지만 복습만은 시험 2주 전 벼락치기로 해왔는데.

유튜브로 영상 보며 복습하고, 같이 다니는 호적 메이트를 샌드백 삼아 복습해 보고, 샤워하다 주먹질해보고,,, (샤워하다 넘어질 뻔한 후론 안 하고 있다) 아무튼 생각날 때마다 휘두르니 집에선 피해야 할 1순위 인간이 되어버렸다.



운동을 한 후로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나의 학습 형태였다. 내가 다니는 복싱장은 꽤 진도가 빠른 편이다(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싶기도). 1주 차에 3세트, 2주 차 4세트, 3주 차 5세트... 일주일 만에 세트가 훅훅 오른다. 거기에 스탭, 원투, 훅, 어퍼,,, 일주일에 하나씩은 배워야 하는가 싶을 정도로 진도를 맞춰야 한다며 외친다. 본의 아니게 나는 관장님의 진도에 열심히 반항한 인간이 되어 어느 순간부터 배제되었지만.



나는 차근차근 정석형으로 기본을 완벽히 쌓은 다음 단계를 쌓는 방식을 선호한다. 날래날래 전체형과는 맞지 않는데  왜냐하면 모르는 상태로 계속 그 윗단계를 쌓아나가면 흥미를 잃기 때문이다. 날래날래 전체형은 전체적인 면을 두루 볼 수 있고, 다시 처음으로 갔을 때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점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 같은 방식을 가진 사람은 그 과정에서 흥미를 잃어서 아예 포기해버리고 만다. 기본이 안 된 상태에 다음 과정을 나간다는 건 모래성을 쌓는 느낌을 준달까. 아니면 진도에 쫓김을 안 좋아해서일 수도 있다.

몸을 움직이며 복습하는 것은 실행할 동력을 준다. 직접 움직이면 발전한다는 변화를 봐서일까. 예전엔 읽으면 그만이었던 책도, 이젠 읽고 나면 제법 뭔가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드니 말이다.



복싱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뜻하지 않았던 발견을 하기도 하고. 운동할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들지만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여러 가지 생각이 수문이 열린 듯 차오른다. 어릴 땐 운동과 학습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도 없었는데. 꽤나 관련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가끔 의문이 들었다. 왜 깨달음은 항상 늦게 찾아오는지. 조금 일찍 찾아왔으면 좀 더 덜 불안하고, 덜 아파했을 텐데. 지금은 그런 가정과 후회 대신 단호함이 찾아온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의 생각을 못 받아들였을 거라고. 나의 깨달음의  때가 이 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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