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B No.73 CHANEL
2년 반 동안 30권이 넘는 매거진B를 읽었는데, 반 정도는 사실 읽었다고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꾸벅꾸벅 졸면서 보고는 했다. 아무래도 내가 잘 모르는, 관심 없는 분야를 읽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몰입이 안되기로 1~2순위를 다투는 분야가 패션이었다. 이전에 메종 마르지엘라나 아크네 스튜디오의 경우 읽을 때도 굉장히 힘들었고, 지금도 떠올려보면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에 읽는 No.73 CHANEL의 경우는 내용이 꽤나 많았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모든 내용을 읽었고, 여운 또한 길게 남는 편이었다. 매거진B 자체가 브랜드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묘사해서 그렇긴 하겠지만, 다른 여느 브랜드들보다 유독 매력적인 브랜드라고 느껴졌다. 창립자인 샤넬의 철학이 지금까지도 그댈 담겨 있어 마치 하나의 사람, 그것도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브랜드였다.
샤넬을 샤넬이라 부르지 못하고 채널로 읽던 시절이 있었다. 제대로 읽게 된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그 시절 나는 패션에 문외한이었다. 어린 나의 생활 바운더리에서 '명품'을 접할 일은 많지 않았고, 언론에서는 '소비=사치' 라는 프레임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보면 경험의 범위가 한정적이었던 내가 샤넬을 채널로 읽는 것은 당연했다.
명품을 새롭게 접하게 된 계기는 상당히 특이한 경험이었다. 대학시절 틈 나는 대로 온갖 종류의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명품 매장에 가서 대신 물건을 사다 주는 구매대행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브랜드의 구매 수량 한정 제한 때문에 생겨난 변종 아르바이트인 셈인데, 지금 회사원이 되고 나니 브랜드 입장에서는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아르바이트이지 싶다.) 남의 돈으로 남의 물건을 사다 주는 것이었지만, 소위 말하는 그때의 '구매 경험'은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에 남는다. 매장에 들어서서 떠날 때까지 이어지는 전담직원의 숙련된 케어, 웰컴 티, 제품 안내와 카운슬링 등은 넘치거나 모자랄 것 없이 편안했고, 구매를 결정했어도 제품 체크 후 미세한 스크레치라도 있으면 판매하지 않는 소신도 놀라웠다.
이후에 취업을 한 후 일을 통해, 간간히 떠났던 해외여행을 통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을 접했고, 나의 사고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명품 브랜드들이 가진, 그 비싼 가격에도 사람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항상 궁금했다.
이번 매거진B 샤넬 편을 읽는 내내, 샤넬이 가진 엄청난 여유가 느껴졌다. 여유가 있기에 할 수 있는 경영방식, 그리고 그 경영방식이 만드는 공고한 샤넬의 세상이 보였다고 할까.
'옷 잘 입는다'의 기준이 무엇일까? 어느 정도는 일치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브랜드도 좋아하는 핏도 모두 다르다. 그래서일까. 패션 브랜드는 끝없이 대중들의 평가 대상이 된다. 어떤 이들은 그 브랜드가 너무 변화가 없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예전의 느낌이 모두 사라졌다며 아쉬워한다. 이런 세상에 살다 보면 때로 초조해지고 심난해질 만도 한데, 샤넬은 마치 그런 모든 것들에 초연한 느낌이었다.
과거에 두 발을 딛고 서서 미래를 창조한다. 말로는 쉽지만 막상 해보면 이게 정말 쉬운 일일까? 어디까지가 클래식의 요소이고, 어디까지가 새로움인가? 새롭다면 무조건 좋은 것일까? TOP이 생각하는 새로움의 수준과 말단 Staff 가 생각하는 새로움의 수준이 같을 수 있을까? 일 년에 10번씩 진행하는 컬렉션에서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맞아떨어질 가능성은? 그렇게 어려운 길이지만, 샤넬은 분명히 그것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과감하게 새로운 해석을 더한 컬렉션을 진행한다. 세상이 모두 이커머스를 외치지만 지금은 특별한 부가가치가 없다며 하지 않는다. 하지만 컬렉션에 누구보다 빠르게 셀피의 요소를 반영한다. 동양과 아프리카, 전 세계를 돌며 영감을 얻어 컬렉션에 반영한다. 모델들이 샤넬과 다른 브랜드를 믹스 매치하는 것을 허용하고, 자신들의 룩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을 장려한다. 사라져 가는 공방에 투자하여 유산을 지켜내지만, 그들이 우리만을 위해 독점적으로 일하도록 하지 않는다. 공방이 자신들만의 시간과 리듬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존중한다. 이렇게 본인들의 소신과 철학이 샤넬이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공고하게 지키고, 압도적인 퀄리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선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시켜서, 떠밀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한 철학과 가치관에 기반하여 그 길을 가는 것. 이미 정점에 서 있는 브랜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긴 하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샤넬의 창립자 가브리엘 샤넬의 정신과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녀의 이런저런 연인들..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정적인 평가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의 현대 복식사에 미친 그녀의 영향력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보며 가장 놀랐던 점은, 그 시절 굳어있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아무런 배경도 없던 한 여자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끝까지 지켜냈을까 하는 점이다. 단순히 소신을 지켜내는 것을 넘어, 주변 사람들이 그것에 동조하게 만들고 자신과 함께 만들었다는 점에서, 철학과 실력 모두를 갖춘 이상적인 경영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칼 라거펠트 할아버지께서 이 정신을 너무나 잘 계승해서, 지금의 샤넬에 심어놓은 것 같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매년 연말이 되면 나의 한 해를 돌아보고 다음 한 해를 어떻게 살아갈지 적어 보고는 하는데, 언젠가부터 매년 새해 계획에 포함되는 문장이다. 돌이켜보면 결과와 관계없이 후회가 남고 아쉬웠던 때는 모두 내가 진정 나이지 못했던 순간들이다. 때로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눈치 보느라 나의 귀중한 시간을 버리고, 진정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지 못했고, 때로는 내가 아는 것이 없어서 남이 시키는 대로 했다가 많은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배운 삶의 진리가 있다면, 내가 나의 길을 직접 선택해야 어떤 결과가 오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의 목표는 당연히 샤넬백을 사는 것도 아니고, 샤넬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샤넬의 정신-내 신념과 철학에 기초해서 나의 길을 간다-는 나름 목표로 삼아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샤넬을 채널로 읽던 시절 나는 유독 주변 눈치를 많이 보던 소년이었다. 그것이 때로는 착하다는 말로, 어른스럽다는 말로 돌아왔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소년은 참 여유가 없었고, 이리저리 부치면서 살아왔겠구나 싶다. 나는 아직도 부족하고, 온전히 나의 길을 가기에는 여유가 부족하다. 하지만 다이어리에 적어 놓은 한 문장은 항상 기억하려고 한다. 채널과 샤넬의 중간 그 어디쯤에서, 언젠가는 브랜드 샤넬처럼 실력과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길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