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고찰
스터디에서 매거진B 에 나오는 다양한 브랜드들의 이야기를 읽고 토론하다 보면, 그 날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열렬하게 지지하는 속칭 '멋진' 브랜드들이 발견되고는 한다. 물론 브랜드를 소개하는 책이다 보니 당연히 그 브랜드에 대해 매우 있어 보이게 기술되어 있는 측면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브랜더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할만한 '멋짐'이 있는 브랜드들이 있다.
이런 '멋진' 브랜드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고집스러우리만치 본인들이 정한 기준이나 방식을 정확히 지켜낸다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조금만 방식을 바꾸면 훨씬 많이 팔 수 있을 것 같은데도 그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다. 아래 첨부한 브런치 글에서 브랜딩이란 - 본인들만의 원칙을 세우고 일관성을 가져가는 것 -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멋진' 브랜드들은 이런 브랜딩의 개념을 정말 잘 지켜나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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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왜 이런 브랜드가 없을까?"
스터디에서 토론하다 보면 항상 마지막에는 '한국에는 왜 이런 색깔 있는 브랜드들이 없을까? 내지는 부족할까?'로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는데, 모두가 동의했던 제일 크리티컬한 원인은 '한국의 경영 문화는 일관성을 지키기 어렵고 단기 성과에 집착한다.'는 것이었다.
경영문화라는 것이 조직구도의 문제, 문화의 문제 등 여러 가지가 맞물려 있지만 어쨌든 단기 성과 위주로 돌아가는 경영 방식이라든지, 담당자나 조직이 바뀌면 브랜드의 결이 완전히 달라진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이슈들은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일 것이다. 한마디로 원칙도 없고, 일관성을 지켜나가기도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그러면 한국은 왜 브랜딩에 있어 원칙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것일까? 한국 조직문화에 대한 분노를 품고 이야기한다면 '이게 다 바뀌지 않는 꼰대들 때문'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역설적으로 우리나라가 너무나 빨리 변화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압축 성장의 시기 속에서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유럽이 선진국이고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곳은 세상이 바뀌었던 속도가 우리보다 훨씬 느렸다. 일례로 그들이 몇백 년에 걸쳐 만든 민주주의라는 토대를 우리는 단 몇십 년 만에 받아들여서 적응해야 했고, 세계 최빈국에서 나름 선진국 끝자락까지 순식간에 도달한 경제 영역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유럽 브랜드들은 공방에서 시작하여 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회 발전과 함께 서서히 변화할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변화하는 경제/사회상에 맞게 일단 대응하고 보는 게 더 옳은 전략이었을 수 있다.
우리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화한 중국의 경우도 사실 비슷하다. 몇 년 전 중국에 머물 때 전 세계 짝퉁의 총본산이라는 광저우 짝퉁시장을 간 적이 있었다. 명품에 대해 잘 몰랐던 시절이지만 딱 봐도 엄청난 퀄리티의 속칭 S급 짝퉁들이 즐비했는데, 이것만 봐도 그들의 제조력/품질력이 절대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일부 Tech 기업의 서비스들을 제외하면 중국에 '브랜드'라고 할만한 것들은 아직 세계시장에서 보기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속칭 '풍요의 시절' 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유럽 선진국들의 경우 돌아가면서 전성기를 누렸고 이 시절 전 세계 식민지로부터 많은 부를 축적했다. 미국의 경우도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한국 리테일 시장보다 항상 몇 발 앞서있는 일본도 메이지유신 이후로 꾸준히 강대국의 위치에 있었다.
브랜드는 예술이 아니라 상업활동의 결과물이다. 즉, 매출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색깔 있는 브랜드 일지라도 그것을 사랑해주는 팬이 없다면 결국 지켜질 수 없다. 그리고 색깔 있는 브랜드까지 사람들이 찾아서 산다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상당히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상당 수준 소비생활이 발달한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마지막으로 이런 소비생활은 당연히 풍요로운 경제 환경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대충 정리해보자면 풍요의 시기를 거칠 수 있었던 선진국들은 이런 식의 선순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풍요로웠던 시기 → 소비가 많이 일어남 → 취향의 발달 → 다양한 브랜드 탄생 → 브랜드를 소비하는 취향의 진화 → 브랜드 발달
우리나라도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기는 했지만, 과거 선진국들이 누렸던 풍요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시간 자체도 짧을뿐더러, 규모적으로도 달랐고, 또한 소비보다는 저축이 우선이었고 일단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다. 사실 브랜드란 개념이 이렇게 흔해진 것도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들 말고도 과거 상공업을 중시했던 유럽의 공방 문화라든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의 영향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겠지만, 큰 흐름 상에서 위의 2가지 - 1) 변화가 너무 빨라서 일관성이 자리 잡을 새가 없었다. 2) 풍요의 시기가 없었고, 때문에 브랜드의 자양분인 소비를 통한 취향이 자리 잡을 수 없었다. - 가 한국에 색깔 있는 브랜드가 부족한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색깔 있는 브랜드가 없다고 쓰긴 했지만, 글을 쓰기 위해 약간 과장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지금의 한국은 누가 보아도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위에서 말한 원인들이 이제는 상당 수준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다못해 식당의 경우만 봐도, 몇 년 전에는 어떤 아이템이 하나 떴다 하면 전 도시에 유사한 형태의 프랜차이즈들이 깔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만 품을 팔면 유럽, 남미, 아시아의 음식들을 다양한 형태로 모두 맛볼 수 있고 레시피도 콘셉트도 모두 다르다. 소비 수준이 달라지고 해외 경험을 한 사람이 많아지면서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도, 소비하는 사람도 모두 상당한 수준의 취향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 년 뒤 한국에는 더욱 멋진 브랜드들이 많아질 것 같고, 개인적으로 정말 많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