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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고래 Sep 05. 2019

영업지원직이 영상 찍으러 전국투어 한 사연

모바일 교육 플랫폼 만들기 4편

https://brunch.co.kr/@linkyspark/41

(위 글에서 이어집니다)


 시험 삼아 만들어본 한 편의 영상 덕에 어느 정도 감은 잡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었다. 교육 플랫폼 오픈까지는 두 달도 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고, 확보한 교육 영상은 단 1편이었으며, 교육 강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업부에서 팀으로 하는 일을 담당자 한 명이, 아니 0.3명이 하는 것은 애당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대로는 힘겹게 교육 플랫폼을 오픈한다고 한들 제대로 된 강의도 없는 텅 빈 모습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답은 없고 시간은 또 하루하루 가던 와중에, 문득 몇 개월 전 팀장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대충 요약해보자면, 원료부터 연구-생산-마케팅-영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한 회사에서 커버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 장점이고, 그 담당자 한 명 한 명을 활용해서 교육영상을 만들어보라는 이야기였다. 처음 들었을 때는 가뜩이나 바쁜 사람들 붙잡고 교육영상을 찍는다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절박함은 창의력의 원천이라고 했던가, 마냥 답 없어 보이던 그 아이디어가 오히려 빠르게 많은 양의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팀장님의 그 뜬구름 잡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얼기설기 기획서를 짜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번 영상을 찍어봤기 때문에 대략적인 업무 진행 방식과 예산 등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생애 처음으로 약 2천만 원의 예산을 한 번에 집행하는 계획을 팀장님에게 들이밀었다. 원료산지인 제주도부터 공장이 있는 충북 진천, 연구소가 있는 용인, 그리고 서울과 부산의 매장들까지 포괄하는 전국 투어 일정이 포함된 영상 기획안이었다. 사실 회사 내에 다른 브랜드들은 억 단위로 비용을 쓰는 일도 흔했기에 2천만 원 정도야 별 일 아닐 수도 있지만 변방 작은 브랜드의 쪼렙 신입사원이었던 나로서는 꽤나 대담한 도전이었다. 

 솔직히 정말 엉망으로 만든 기획안이어서 대차게 까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팀장님은 흔쾌히 그대로 진행하게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팀장님의 아이디어가 반영된 탓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각 부서에 업무연락을 띄우고, 메일을 보내서 협조 요청을 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팔자에 없던 전국 투어 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전국 출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삽질의 연속이었다. 작게는 출장 품의를 쓰고 비용을 집행하는 사사로운 일부터 일정 조율과 콘텐츠 기획, 실제 촬영 진행에 이르기까지 쉽게 쉽게 해결되는 일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타 부서에 연락해서 촬영 요청을 하고 강사로 출연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아무리 상무님 승인을 통해 업무연락을 사전에 보냈다고 해도, 신입사원이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타 부서/타 법인의 10년 이상 차이 나는 분들에게 일을 부탁한다는 것이 심적으로 많이 부담이었다. 그래서 당시 이런저런 사정을 같이 쓰다 보니 메일이 엄청나게 길어졌었는데, 때문에 요점이 뭔지 알 수가 없어 다시 되묻는 분들도 많았다. (그때의 장황한 메일을 보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메일은 무조건 간결하게!) 

 일종의 게스트 강사(?) 같은 느낌으로 출연해주신 각 부서의 담당자분들은 엄연히 주업이 따로 있는 바쁜 분들이었기 때문에 사전에 대본 작성 같은 것을 부탁드리기는 어려웠고, 사전에 대략적으로 필요한 내용을 말씀드린 후, 실제 촬영 전에 잠깐 내용 조율을 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고는 했다. (사전 회의를 하고 대본까지 철저하게 만들었으면 좋았겠지만 일단 내가 그럴 깜냥도 안 되었고 전국에 모두 흩어져 계시다 보니 시간적으로도 촉박했다.) 나중에 편집될 것까지 고려하여 촬영을 진행했어야 했기 때문에 나와 촬영팀 모두가 즉석 해서 내용을 공부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1, 2편에서 언급했던 IT 플랫폼 개발과는 또 다르게, 영상 촬영은 그야말로 야생의 느낌이었다. 사전에 최대한 조율을 하더라도 실제 촬영에 맞닥뜨리는 변수들을 모두 컨트롤 할 수는 없었기에 순간순간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 했다. 제주도의 경우는 야외 촬영도 많았는데 하필 그 당시가 장마철이어서 날씨 상황을 보면서 진행해야 했고, 공장에 방문했을 때는 기계 문제로 꼭 찍어야 하는 공정을 찍을 수 없어 급하게 일정을 조정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출장을 다니면서도 사무직으로서 나의 다른 업무들은 계속 진행을 해야 했기에, 촬영진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나는 숙소에서 데스크 업무를 따로 해야 했다. 


(출처 : tvN 꽃보다 할배)


 이렇게 어렵고 힘들었음에도,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회사 생활을 통틀어 가장 즐거웠던 순간들 중 하나였다. 


 힘든 부탁이었지만 흔쾌히 도와주신 고마운 분들과 함께 하며 같이 일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교육 콘텐츠를 만들면서 나 스스로가 원료와 상품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또한 하루하루 맞닥뜨리는 어려움을 해결해 가며 뿌듯함을 느끼고 성장의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자율성을 가지고 판단을 하며 업무를 진행하고, 나름의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었기에 그 시절이 어느 때보다 즐거웠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내가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프로젝트가 회사/윗분들이 원하는 방향이었고 내가 그 틀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유사한 프로젝트를 진행해보려고 제안도 많이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회사의 생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지금까지 회사원으로 계속 살아오면서 회사의 방향 안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자 노력한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주장하기에는 아직 회사를 설득할 정도로 대단하지는 않고,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만 무조건 따르기에는 나 스스로가 너무 답답하니까.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맞춰나가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은 회사생활 6년 차에 이른 지금도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 한편을 쓸 수 있는 새로운 에피소드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인 것 같다. 


*글을 쓰고 생각을 담는 모임, #쓰담의 멤버로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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