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전문가의 탄생
요즘 부쩍 친구와 둘이서 그리 오랜 시간 같이 살 수 있는 비결이 뭐냐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십 대 초반부터 마흔 살이 넘은 지금까지 친구와 동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꽤나 재미있는 일상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나도 나름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나와 친구가 이렇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게 무엇 때문인지.
그러다 얼마 전 친구가 노트북 앞에 앉아 낯설게 배시시 웃으면서 무언가 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19년 차 개발자로 살고 있는 공대 아름이인 친구는 잔뜩 신이 난 채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뜬금없이, 책을 한 권 쓸 거라 했다.
“책? 무슨 책? 갑자기 책은 왜?”
“책을 낼 거야. 제목을 이미 정했어.”
“제목을 정했어?”
“궁금해?”
“응”
“내 친구를 빌려드립니다, 라고 정했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책을 낼 거야.”
가끔 자다가 봉창을 귀엽게 두드릴 때가 있는 친구이긴 한데 난데없이 친구를 빌려 드린다는 내용으로 책을 쓴다니, 웃겼다.
“혹시 그 친구가 나야?”
“응”
“나를 왜 빌려줘?”
“인류의 평화를 위해 내가 너를 빌려주기로 했어. 크크크”
친구가 쓰는 책 제목은 이랬다. ‘친구를 빌려 드립니다 시리즈 1편: 타인과의 동거 전문가 친구, 필요하신 분들 빌려 가세요’
1분을 내리 웃었다.
“내가 동거 전문가야? 어감이 좀 요상한데?”
“너 정도면 전문가 맞아.”
생각해보니 성인이 된 이후 스무 해 넘게 살아오는 동안 꽤 많은 동거의 경험이 있다.
아, 오해를 피하기 위해, 굳이 피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언급을 한 번 하자면 동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한집이나 한방에서 같이 삶 그리고 부부가 아닌 남녀가 부부 관계를 가지며 한집에서 삶. 후자의 동거 전문가라면 조금 더 삶이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했을 듯한데 아쉽게도 나는 한집이나 한방에서 타인과 같이 살아온 전문가이다. 언젠가 후자 쪽 전문가가 된다면 신나게 글을 한 번 써보겠다.
내 동거의 경험은 이렇다. 멕시코 과달라하라 일반 가정집에서 몇 개월, 미국 샌디에고에서 몇 달간 프랑스인 룸메이트와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캐나다 밴쿠버에서 몇 개월,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직장 동료와 1년 반 동안 같이 산 적이 있고 멕시코 시티에서 4년 간, 온두라스 산페드로술라에서 1년 반 동안 동료와 같이 살았고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2년 남짓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구와 같이 살았다. 타지에서 10년 정도를 가족이 아닌 타인과 동거를 했고 나머지 10년 정도는 가족이 되어버린 친구와 같이 살았으니 타인과의 동거 경험이 적은 편은 아닌 듯하다. 한 우물을 20년 파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타인과의 동거 전문가인가.
친구는 강력히 주장했다. 나는 전문가가 맞다고. 이유가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타인과의 동거 전문가, 이 타이틀이 썩 마음에 든다.
이러고는 우리의 대화는 일단락이 되었다. 그런데 사건은 이제부터다. 야심 차게 시작했던 친구는 장대한 시작과는 달리 진행이 미약했다. 한 며칠 컴퓨터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더니 친구는 눈이 퀭해졌다.
“내가 정말 제대로 써보려고 마음먹었거든. 그런데 아직 한 문단을 못 썼어. 어쩌면 좋을까?”
“열심히 잘해봐.”
며칠을 시달렸다. 칼을 뺐는데 시금치도 못 썰고 있다는 둥 정말 술술 잘 써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우주 최고 바보가 된 것 같다는 둥. 귀엽다. 그녀는 나름 고도의 전략을 발휘 중인 것 같다. 나는 틈틈이 취미 삼아 쓰는 일기 형태의 에세이를 쓰곤 하는데 친구는 ‘글 쓴 거 없냐, 있어. 봐도 돼? 응. 어디 있어? 어디 어디 폴더에. 오케이.’의 방식으로 20년째 자체 구독을 해왔다. 책 한 번 내보지 않겠냐고 15년째 제안을 하다가 기다리다 지쳤는지 급기야 직접 써보겠다고 저러고 나섰다.
속아 주기로 했다. 글을 한 번 써보기로 했다. 타인과의 동거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20년 동안 한 우물은 고사하고 3년 이상 한 분야에 머물러 본 적 없는 새로운 일 도전하기 쟁이인 내가, 듣고 보니 나도 모르는 새 전문가가 되어 있는 분야가 있는 것 같은 게 묘하게 설득이 되었다.
친구와 장난스럽게 시작한 한집살이가 20년이 넘어가면서 그 속에 수북이 쌓여 있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 파견/유학/취업으로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겪은 다양한 사건 사고들. 재미나게 글로 풀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꽤 많을 것 같다. 생각보다 중요한 같이 살 사람 선택하기, 안 맞는 사람과 같이 살 때의 괴로움, 그렇지만 늘 해결책은 있기 마련이라는 깨달음, 사람 사는 건 지구별 어디에서나 비슷하다는 것, 다른 사람과 한 집에서 조금 더 즐겁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타인과의 동거 전문가가 맞는 것 같다?!
이렇게 탄생했다, 한 사람의 동거 전문가가. 동거 전문가로서 나의 첫행보, 글 쓰기, 이미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