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빌리지 않은 빚이 남겨졌다.
할아버지는 남긴 것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빚이 남아있을까 온 가족이 두려워했다.
20년 전 요즘의 대형 체인 슈퍼마켓 크기의 슈퍼를 했다.
그런 집에서 빚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게 참 씁쓸했다.
장사가 한창이던 즈음, 엄마는 빚쟁이들이 쫓아다니든 내 아버지를 뒤로 하고, 할머니네 집으로 자식 둘을 안고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아빠의 빚을 갚아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큰 이모의 집도 크고 작은 빚을 갚지 못해 허덕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다지 관대한 장인어른은 아니었는지, 그들이 사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할머니네는 동네 산자락 초입에 있는 다락이 있는 작은 단독주택이었다.
엄마가 할머니에게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할머니 내외와 곧 결혼할 작은 이모, 아직 결혼이 멀었던 삼촌 둘이 함께 살던 집이었다.
화장실도 한 칸뿐인.
시집간 큰 딸이, 그런 집에 언제 빚쟁이들에게 도망쳐 올지 모르는 남편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 집에는 난방이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단칸방이 있었다.
냉골인 그 방에 엄마는 자처해서 살기로 했다.
자식들이라도 연탄을 떼는 방에서 자도록, 그리고 도망 다니는 자신의 처지가 동생들에게 혹여라도 나쁜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말이다.
덕분에 나는 작은 이모의 방에 몇 권 있는 교과서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장난감조차 없이 나온 동생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 끼어 잠들게 되었다.
반년 정도 지났을 때, 아빠가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아빠는 냉골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일을 하러 집에 없을 때가 돼서야 잠시 나와 끼니를 때우는 것 같았다.
그런 생활을 하던 아빠는 양가의 형편을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인연이야 끊어졌지만 아빠의 아버지는 할머니가 아닌 다른 분과 살림을 하고 계셨다.
할머니 역시 직업 없이 고모들과 생활을 하고 있어서 비빌 언덕은 아니었을 거다.
그러니 엄마의 친정으로 얹혀사는 선택을 했을 테지.
그래서 어느 정도는 엄마의 아버지가 변제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할아버지가 능력이 없어서, 해주지 못했는지 선택하여 안 해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에게는 큰 빚만 남았다.
그 시절에는 본인 확인 절차를 대충 넘기고 신용카드를 발급이 가능했다.
갓 결혼한 작은 이모의 남편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무한정 만들어 사용했다.
부부 사이에 아이가 막 태어날 즈음에는 소화할 수 없는 수준의 빚으로 불어나, 신용대출과 카드론으로 돌려 막고 있었다.
카드 명세서 수취 주소나 전화번호를 모두 자기 앞으로 기록해둔 덕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신용불량자 통보를 받기 전까지 까맣게 몰랐다.
영문도 모른 채, 그나마도 정부에서 행정에 오류가 있을 거라고 믿은 순진한 노인들이었다.
통장이 압류되고 나서야, 부랴부랴 이게 무슨 일이냐, 우리같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생길 일이 없다며 항변했다.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사기꾼으로 형법상 처벌을 받고 민사상 손해배상을 받으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변제받을 수 있었다.
작은 이모는, 아이의 아버지를 사기꾼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사랑할 수는 없어도, 아이를 범법자의 아이로 키울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이모는 이혼을 하고 아이만 데리고 다시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적지 않은 충격이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맥경화로 쓰러지셨다.
대형마트들이 동네로 막 밀고 들어올 때 즈음이었는데, 배달해주지 않는 슈퍼는 자연히 도태되었다. 그래서 할머니 역시 자연스럽게 일과 함께 살고 있던 주택을 모두 정리하고, 파산신청을 했다.
작은 이모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모시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삼촌들은 각자 작은 집을 얻어 쫓기듯이 독립했다. 오히려 그 편이 본인들까지 쫓기지 않는 선택이었으니. 할아버지는 다시 빚쟁이에게 쫓기는 딸과, 심지어 이번에는 본인도 함께 쫓기며, 다시 퍽퍽한 동거를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