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하는 족족 돈이 나갈 구멍은 있었다.
나에게 명절 연휴 하루 전은 늘 시댁의 제사를 치르는 날이었다. 결혼해서 처음 제사상을 차리던 날, 명절에 말 그대로 초상집이었겠구나 하며, 남편에게 고생했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동생이 낫지 않으면 명절에 나도 상을 치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시댁은 제사를 간소하게 지내는 편이라, 모이는 사람들이 먹을 반찬은 내가 따로 해가곤 했다.
그날은 LA 갈비를 했는데, 내가 한 갈비를 곧잘 먹는 동생이 생각이 났다. 동생이 입원한 병동으로 내가 들어갈 수는 없어도, 1층에서 도시락을 넘겨주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아빠에게 전화해 배달해 줄까 했더니, 시간이 되면 부탁한다고 했다.
평소에는 힘들게 올 필요 없다고 늘 얘기하던 양반이 그런 얘기를 하니 이상했다. 근처에서 무얼 사다 줘도 동생이 안 먹는다며, 뭐든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만, 거기서 구울 곳이 없으니, 데워 먹을 수만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퇴근하고 제사를 갈 생각이었던 나는, 동생에게 갈비를 배달할 시간이 아침 출근 전 밖에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갈비를 굽고, 행여 지하철에서 냄새를 새어 나갈까 여러 겹 꽁꽁 싸매어 도시락 가방에 넣었다. 서울이지만, 명절 연휴 전 새벽녘 지하철에는 사람이 없었다.
철컹 거리는 소리 속에, 환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날들을 계획해 보았다. 동생의 당뇨는 어린 날에 병원을 다니면서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야하는 정도였다. 다행인지, 관리만 잘하면 아프지는 않아서 내 생활에 영향을 줄 일은 거의 없었다.
대학 생활 이후에 투석을 시작하면서는 매사 몸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입맛이 없다고 하며 신장에 좋지 않다는 온갖 자극적인 음식을 찾았다. 달고 짜고 매운 것들. 신장에만 좋지 않은가 하면, 만인의 건강에 추천하지 않는 음식들, 배달 음식들로 허기를 채웠다.
버스 한 두 정거장의 거리도 택시를 불렀다. 투석을 하고 온 날에는 하루 종일 잠을 잤다. 분기에 한 번씩 2주 가량 입원을 했고, 보호자를 찾았다.
아빠는 내가 결혼하면서 생활비를 끊자 택시 운전을 했는데, 그마저도 집에 환자가 있으니 COVID-19 시국은 위험하다며 집에 다시 눌러앉았다. 백신을 모두 맞은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저 펜데믹은 그에게 일하지 않을 좋은 핑계였을 뿐. 엄마는 아빠가 일하는 잠시 집에 있었지만, 아주 잠깐이어서 거의 쉼없이 일했다. 하지만, 계속 경력이 단절되어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는 어려웠고, 마침내는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마저도 정년이 보장되는 일이라 감사하다며. 그래서, 동생의 병원비가 나왔을 때, 엄마가 일해서 벌 수 있을 때는 내 손을 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나마 희귀 난치성질환이라 부담금을 특별히 산정해주어 적게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응급실에 중환자실까지 있어서 꽤 비용이 청구되었다. 그런데, 엄마는 5년 후면 남은 세 식구가 모은 돈이 없어서 장녀 혼자에게 의지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식들의 벌이가 풍족하지는 않아도, 여럿이라 부담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누군가가 좋은 시절에는 누군가가 부담을 덜 지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동생의 현상유지와 엄마 아빠의 노후는 온연히 내 몫이었다. 더군다나, 다들 건강하지는 않아서, 자주 앓는 엄마 아빠의 병원비도 함께 책임져야 했다.
심지어는 젊은 날에 아빠의 빚을 갚으려 모든 보험도 해지해버려서, 그 흔한 실비보험도 없었다. 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기저질환들로 인해 보험 가입이 모두 거절되었다.
긴 병에 효자 없고,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집안 기둥 뿌리를 뽑는다고 했다. 그간 다수의 인원에게 복지 혜택을 주었다면, 최근 배제되어온 소수들에 초점이 맞춰진 정책들이 많이 나온다. 아마, 여럿의 소득이 있어도 환자 한 사람의 치료를 위해 소요되는 비용이 엄청났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장애인의 형제자매가 느끼는 소외의 감정들을 어루만질 프로그램도 개발되고 있다. 그렇지만 내게는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런 가족들의 기준보다 높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모든 사회적 혜택은 연봉을 가지고 결정된다. 물론, 벌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불공평할 수는 있다. 막상 계산기를 두드려보면, 그렇게 정부에서 네식구가 지원받는게 내 연봉보다 많을 수 있었다. 나는 노동을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지경이었다.
그래도 내가 아이를 가질 때를 대비해서 일을 그만두기도 어려웠다, 내가 건사해야 하는 가족들의 무게는 내게 너무 무거웠지만, 도망갈 곳도 딱히 없었다. 그런 마음들은 엄마에게도 느껴졌으리라.
엄마 역시도 장녀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