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함을 느끼는 회로가 고장났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함께하고 싶었던 그 명절이 돌아왔다. 엄마는 제 생일이 돌아올 즈음이면 입원하는 동생을 늘 안쓰러워했다. 이번엔 명절이 돌아오는데 입원해있는 아들이 또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공교롭게도 동생은 명절 연휴가 시작하기 직전에 내가 보낸 갈비를 시작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명절 연휴에 퇴원을 했다. 엄마는 명절에 아들 없이 보낼 생각에 울적해하고 있다가 갑자기 밝아졌다.
시댁에 가는 길에 엄마에게 문자를 했다.
"동생 퇴원해서, 가족이 함께 보는 명절이라 기분이 조금이나마 낫겠어~"
"응. 조금 나아."
"그런데 왜 기운 없는 말투야?"
"엄마 마음을 너무 알아주는 딸이라서. 철이 없어도 없을 나이에, 너무 동심을 빼앗은 것 같아서."
어린 날에 느낄 감정들을 너무 못 느끼게 하고 자라게 해 준 것 같다고. 하면서. 꽃이 피면 예쁘다, 맑은 날에는 바람이 좋다 처럼. 사실 딱히 양육 방법이 다르거나,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더 감탄하는 삶을 살았을 것 같지는 않다.
행복을 느끼는 정도는 유전자가 결정한다는 연구도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산골에 살아서 학교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눈이 오면 넘어지기 일쑤인. 동네의 어린아이들은 쓰레기통 뚜껑을 타고 내려가기도 했다. 나는 그 눈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등굣길이 험난하겠다고 투덜거렸다.
엄마는 눈이 너무 예쁘고, 세상이 하얗다며 감탄했다. 그런 모녀를 보며, 할머니는 손녀딸 몸속에는 노인이 들고, 딸 몸속에는 어린아이가 앉아있다고 혀를 끌끌 찼다.
노인 같았던 어린아이는, 그런 환경에서 벗어날 기회는 공부뿐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아무리 셈에 밝아도, 동네 슈퍼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성적이야 늘 상위권이었으나, 교과서만 보고 공부해도 성적이 나올 만큼 영민하지는 않았다. 문제집을 살 돈은 없었으니, 사촌 오빠에게 받은 문제집을 최대한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지 한 살 터울의 사촌오빠는 공부에 흥미가 있는 편이 아니었고, 대게 학기 초에 진도 나간 부분에만 문제집을 푼 흔적이 있었다.
겨울방학에 문제집을 받아오면, 그 흔적을 지우는 데 시간을 할애했고, 지우면서 예습도 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수능 때문에 더 이상 문제집을 물려주지 않았고, 학교 선생님들에게 배부하는 샘플 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선생님들은 과목별로 조장 같은 걸 하면, 그 문제집을 큰 선심 쓰듯이 나눠줬다. 그 문제집에는 답이 인쇄되어 나왔지만, 매직으로 지워가며 공부했다.
할머니 말에 따르자면, 엄마도 그렇게 공부했던 것 같다.
엄마를 포함해서 이렇게 자란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심이 살아있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동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비빌 언덕이 없었다. 마음은 늘 쫓겼고 어깨는 늘 무거웠다. 내게는 엄마도 아빠도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만 느껴졌다. 내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거나, 책임을 대신 져주거나 할 능력이 없어 보였다.
덕분에 매사, 안전한지 아닌지 돌다리를 두드려야 했으며, 건너는 시뮬레이션, 하물며는 돌다리를 두드리는 시뮬레이션도 수 백 번은 해봐야 무슨 일이든 진행할 수 있었다. 모험이나 일탈 같은 건 내게 사치였다.
대학생들에게 주요 사치품목은 명품백이다. 가방 하나 없으면,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기가 죽는다며 푸념한다. 그래서 주로 졸업하자마자 첫 월급으로 많이들 산다.
남들이 그럴 때, 나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위험한 취미들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래서 첫 월급으로는 패러글라이딩을 했다. 숙련자가 운전하는 글라이더에 탑승하는 비행이었는데, 발이 땅에 없는 것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누구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내 어깨에 없는 그 느낌. 내가 가로지르는 바람에 그저 몸을 맡긴 상태. 하강은 하고 있지만, 그 속도는 내가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아주 찰나의 시간이고, 다시금 현실로 돌아오면 허탈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가여웠다. 누군가를 책임지지만 않으면, 혼자 살기에 적당한 월급인데 하며. 그렇게 엄마가 나를 위해 희생한 시간들을 잊고 싶었다. 스스로를 가여이 여긴 만큼, 엄마의 인생도 가엽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기는 어려웠다.
엄마에게 패러글라이딩을 하러 다닌다는 얘기를 처음 했던 날, 엄마는 남들 하는 거, 법을 어기는 것만 아니라면 다 해보라고 했다.
사치도 해봐야 뭐가 사치인 줄 안다며. 엄마는 청소하는 직업을 가진 주변인들이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가 엄마에게 매달 미용실에서 하고 있는 머리 염색도 사치 아니냐고 물었을 때 마음이 철렁했단다. 마음껏 해야 마음이 흡족해지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는 범위도 넓어질 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