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런 아빠로부터의 결핍을 자식들의 인정으로 채우고 싶어 했다. 누구나 자신의 찬란한 순간들로 평생을 사는데, 엄마의 찬란한 순간은 공부를 잘해서 누구에게나 칭찬받던 시기였던 모양이다. 주방일, 서빙, 청소 같은 일들이 엄마 스스로에게 주는 포상은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모든 관심은 자식에게 몰렸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늘 바빴다. 아빠가 빚쟁이들에게 도망 다니기 전에는 내 치료를 위해 온 시간을 다 내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안 들릴 뿐만 아니라, 귀의 위쪽으로 살이 접혀 펼쳐지지 않는 상태로 태어났다.
엄마는 내가 수술하기 전까지 10년가량의 세월 동안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들 속에 내 귀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엄마가 그 귀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아이를 고쳐보겠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대여섯 살 때 즈음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을 다섯 번 했으니, 세 살 터울의 동생을 업고서 얼마나 병원을 찾아다녔는지 나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런 수술을 여러 차례 했지만, 청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엄마는 아이에게 장애인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보다, 비장애인으로 사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서 청각 장애인 검사는 아예 신청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장애인 혜택을 모두 포기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하는 청력검사는 늘 머리카락을 건드렸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방향으로 들린다고 대답했다.
그런 아이가 학교를 가니, 신경 쓸 일은 더 많아졌다. 갈비뼈를 이식하여 겨우 지탱하고 있는 귀의 위쪽이 무너져 내릴까 하던 보호대 때문에 아이가 놀림감으로 전락하지는 않을지, 다른 아이들과 소통은 잘 될지, 노심초사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녹색어머니회 같은 걸 자원하며 늘 학교 주변을 맴돌았다.
그즈음에는 이미, 아빠는 직장이 없어서 엄마의 소일거리가 필요했다. 봉투를 접거나 인형을 만들거나 하는 등의. 그런 일을 하면서도 인스턴트 음식보다는 나을 거라며, 돈가스, 소시지, 떡 같은 것들을 늘 수제로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주 이사하는 이유에 대해서, 빚에 대해서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원을 다니라고 했다. 속셈 학원도 피아노 학원도. 속셈 학원은 재미가 없어 싫다, 피아노 학원은 안 늘어서 싫다고 했을 때,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걸 스카우트가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학교에서 정원이 정해져 있으면 다른 걸 하라고 했다. 그래서 풍물놀이도 했다.
동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람단이 하고 싶으면 그걸 하라고 했고, 태권도가 하고 싶으면 그걸 하라고 했다. 조금 지나, 고등학교는 등하교가 피곤하니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러면 엄마는 매일 널 태워 주겠노라 했고, 실천했다 공학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아무리 여자가 적은 직업군이더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며 도와줄 거리가 없는지를 찾았다.
동생에게도 그랬다. 동생의 당뇨병에 좋다는 것들, 아토피에 좋다는 것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그러면서도 하고 싶은 것들을 하게 해 주려고 부지런히 노력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좋아 조리학과를 가겠다고 했을 때, 네 몸에 맞는 음식 스스로 만들 수는 있겠다 하면서 독려했다.
자식들이 이 모든 것들을 하겠다고 했을 때, 최소한으로 필요한 비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 비용은 지나고 보니, 엄마가 평상시에 하고 싶어 하지 않던 일, 서빙, 설거지, 청소일을 하면서 벌어왔던 돈이었다. 그나마도 부족해 가지고 있던 적금이고 보험이고도 다 해지했다.
엄마가 엄마의 인생의 매일매일을, 하루도 빼지 않고 헌신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아빠와 비교하여 더욱더 헌신이 도드라져 보이기도 했다. 엄마에게 늘 고마운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에 비례하여 엄마의 헌신이 내게 무거웠다. 엄마는 늘, 그런 선택의 이유가 너희 때문이라고 했다. 너희만 바라보고 아빠를 참는다고 했다.
나는 중학교 시절, 과학 과목에서 “임신과 수정”을 배우며, 엄마의 결혼기념일과 내 생일을 비교하면서 엄마의 결혼식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평생을 엄마가 내가 생기는 바람에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고,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엄마에게 확인할 용기조차 없어서. 그래서, 나는 어린 마음에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뻤던 엄마의 과거가 지금처럼 초라해진 것이, 엄마의 찬란한 순간을 방해한 것이 내 존재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