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커서, 할머니와 이모의 쌈짓돈을 용돈으로 받다.
그러던 중에 할아버지의 1주기가 돌아왔다. 외갓집은 모두 기독교인이었으니 자연히 제사가 아니라 추모예배를 지내기로 했다. COVID-19 때문에 모임 할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었다. 엄마 형제들만 할머니에게 가기로 했다.
나는 가지는 못했으나, 시할머니 시할아버지 제사에 하는 만큼을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남편은 그 마음을 먼저 알아챘는지, 우리가 시댁 제사에 보태는 만큼을 진즉 엄마에게 보냈다고 했다. 애초에 나에게 돈을 보내라고 했으면 내가 미안해할 거라고 생각했단다. 제사는 치르지 않아도 사람 모이는데 식사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고. 그래야 할머니가 체면치레를 하신다고.
엄마 말로는, 형제들 형편도 다 고만고만해서 그만큼 용돈을 내놓은 이는 없었단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 돈이 자식들도 아니고 손주 사위한테 온 것이 못내 미안하고 고맙고 황송했단다. 할머니는 덕분에 음식이라도 마련해오라고 흔쾌히 자식들에게 시킬 수 있어서 어찌나 마음이 편했는지를 들떠서 설명했다.
부부들도 자식에게 세울 체면이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엄마는 그렇게 내게 용돈 받는 걸 불편해했구나 싶었다. 3교대 근무를 서보았던 사위가 야간일을 만류할 때도, 고집을 피우던 엄마의 모습이 할머니와 겹쳐 보였다.
그러고 한 달 뒤쯤 나는 이사를 준비 중이었다. 엄마는 몇 차례나 이사에 돈을 보태겠다고 했다. 그래야 남편에게 내 기를 세워줄 수 있다면서. 남편은 장모님이 그럴 줄 알았다며, 받아오면 부부싸움한다고 얘기하라고 한사코 거절했다.
그리고 엄마가 한 풀 꺾인 듯할 때에는 작은 이모가 필요한 가전을 사주겠다고 성화였다. 이제 사촌동생도 취업하고, 밀린 카드 빚도 거의 끝나가서,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고. 그래서 베풀고 나눠주겠다고. 고맙지만 이모 형편이 뻔히 보여서, 살림 다 사서 괜찮다고 마음만 받겠다고 사양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카톡 알람이 울렸다.
"XXXXXX 원을 받으세요."
그즈음 남편의 생일도 다가오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엄마에게 연락을 해 용돈을 보냈다고 했다. 할머니는 생전 내게 용돈을 쥐어주는 분이 아니었다. 늘 이런 말씀으로 내게는 용돈을 주지 않으셨다.
"너는 돈을 잘 벌잖니. 아픈 네 동생 용돈 줘야지"
갑작스러운 용돈에 당황하던 차에 엄마한테 카톡이 왔다. 할머니가 손주 사위한테 너무 고마워한다고. 너희에게 적은 돈이어도 할머니에게는 큰돈이니 꼭 받아주면 좋겠다고. 그건 5만 원이었다.
용돈을 건네받은 남편은 할머니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고 전화하라고 뭐라도 하지도 않았다. 으레 다음 명절에 바리바리 선물을 사 가지고 가자고 할 마음을 알기에.
그러고 보니 엄마의 마음도 늘 그랬다. 표현하지 않았어도 미안해했고 고마워했다.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지 못한 것도, 유학가지 못한 것도, 일찌감치 취업전선에 오른 것도. 엄마는 늘 미안해했다. 한껏 느낀 죄책감은 나에게도 전이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좋다는 내 말은 엄마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나는 좋은 직장을 가지기에 초기 자본이 부족한 편이었다. 흔히 돈으로 스펙을 사는 시대에서, 나는 완연히 시간으로 스펙을 만들었다. 그 시간은 엄마와 할머니가 마련해 준 것이었다.
당신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해, 정성을 바쳐 등하교를 시켜주고, 살림을 대신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받은 시간을 완연히 공부해서 스펙을 만드는 데 썼다. 사람이 사람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소진해야 하는 시간을 나는 엄마와 할머니의 전적인 지원으로 받았다. 재산이나 유산이 아니어도, 자라는 동안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았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하는 데에 엄마의 시간이, 할머니의 기도가 있었다. 아무리 내가 종교인이 아니어도, 늘 기도하는 할머니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었으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부모와 자식관계라고 해서 그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내가 받은 것은 일반적인 헌신의 정도보다 한참 더 과분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