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독을 새로 장만하기 위한 한걸음으로 집을 샀다.
나는 번듯한 집의 아들을 남편감으로 선택했다고 해서 인생을 한 순간에 다릴 수 없다는 걸 엄마를 보면서 어렴풋이 알았다. 그리고 이런 집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나중에 내 결혼생활에 책으로 잡히지 않기를 바라였다.
그래서 동등하게 형편에서 새 살림을 시작했다고 강조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희망했다. 남편은 그래도 나보다는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내가 가진 직업의 안정성도 함께 고려했던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서로 악착같이 월급을 모았다. 80% 이상 모은 달이 부지기수였다. 남들은 많이 버는 부부가 세면대도 없는 집에서 결혼반지도 없이 결혼을 시작하고, 차도 없이 좋은 가방이나 시계도 없이 생활하는 걸 의아해했다. 덕분인지 남들보다는 조금 빨리 집을 샀다.
동생이 퇴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집을 보러 가면서도, 계약을 마음먹은 순간에도 엄마에게 전화는 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게 좋은 일이다 아니다를 떠나 걱정부터 시작일 것이 뻔했다. 엄마와의 대화 끝에는 내가 선택을 포기할 것이 눈에 보이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엄마는 늘 주변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들을 일이 없었다. 그냥 즐거운 일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늘 나쁜 일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어느 날 전화하면, 택시 승객과 아빠가 싸웠다는 얘기, 다른 날은 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얘기, 그러다가 본인이 교통사고 났다는 얘기. 남들은 교통사고가 나면 며칠에 걸쳐 입원해있다가 보상금을 받기도 한다던데, 무보험 차량과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
그렇다고 내가 두어 달에 한번 전화하는 것도 아니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들에 항상 그런 얘기들 틈에 엄마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 얘기를 전달하기 전에 항상 집에 무슨 일은 없는지 물었다.
그래서 잔금을 치르러 가기 전까지도 언제 엄마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때마침 연락 온 동생이 집에 일이 없다고 하길래 집을 샀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다음날 동생은 갑자기 OTT 아이디를 달라고 했다. 준다고 할 때는 고사하던 애가 굳이 지금 달라고 하는 게 이상해 캐물었다. 다시 입원했다고 했다. 지난번 입원하고는 별개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동생에게 어제는 왜 아무 일 없냐고 말했는지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걱정할까 봐였다. 그제야 마냥 좋지 않았던 엄마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너무 배려하는 바람에 대화를 시작하는 게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내가 만난 부잣집 아이들은 단순히 물려받을 재산만 많지 않았다. 그들의 가족은 그들이 어떤 일을 헤쳐나갈 때 해결할 지혜를 주거나, 마음의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내게 아빠는 어디에서 화를 낼지 모르는, 내게 불안함을 주는 존재였다. 동생은 언제 쓰러져 모은 돈을 소진하게 될지 모르는, 존재였다. 염마는 그 불안한 순간들에 가장 유약해서 내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할 존재였다. 나는 어느 곳에서도 위로받지 못했다. 내게 비빌 언덕이라고는 없었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지쳐가고 있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남들은 어렵다는 시댁에 종종 들리고, 김장도 자원해서 가곤 했으니. 친정에서 못 느끼는 편안함을 시댁에서 느끼고 있는 딸이 안쓰러웠으리라. 그리고 비슷한 때에 K장녀에 대한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왔다.
엄마는 이따금 그런 콘텐츠들을 보고는 연락해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스스로 할머니에게 받지 못했던 지지와 유대에 결핍이 있다고 했다.
할머니가 투덜거리며 증조할머니를 모셨던 걸 말하며, 엄마에게는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조차도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아니라며. 나에게 그런 선택의 기로까지 넘겨주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시급을 조금이라도 많이 주는 야간에 청소를 한다고 했다. 나에게 감정적인 지지를 줄 수는 없어도, 시간을 할애할 수는 있다고.. 그리고 딸에게 짐으로 남겨지고 싶지 않다고.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치매로 딸을 기억하지 못하는 와중에 매 끼니 상에 새로운 반찬과 고기가 올라와야만 식사를 하셨다. 할머니는 시어머니가 아니고, 본인의 엄마임에도 힘들다고 엄마와 나를 붙들고 한참을 하소연하곤 했더랬다.
심지어 증조할머니는 조금 남았던 재산조차 아들에게 물려주고는, 그 아들이 더 이상 보살피지 않겠다고 고려장 하듯 할머니 댁에 모셔다 두고는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가 측은했지만, 할머니보다 더 팍팍한 환경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어떤 선택에서도 위안을 찾지 못했으며, 엄마의 노후를 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전가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엄마 아빠의 노후를 책임질만한 여력은 있었다. 내가 적당한 소비만 한다면.
하지만, 동생의 병원비는 내가 적당한 소비를 한다고 해서 될 것은 아니었다. 나와 남편의 직장생활은 최소한의 소비로 사람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많이 버는 만큼 음료, 술과 같은 취향, 차량, 옷차림 하나하나에 대한 품위 유지를 요구했다.
그런 소비를 하다 보면, 내 소비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엄마도 좋아할 텐데, 동생에게 해주면 좋을 텐데 하고. 엄마의 인생에 결코 경험해보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미안해지기 일쑤였다.
이상하리만치 시댁에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시부모님을 좋아하지 않아서의 문제는 아니었다.
시부모님은 당신들이 영위하는 삶에 만족하셨다.
아직 일을 할 만큼 건강함에, 집에서 삼겹살 한 근을 사서 일주일을 생활할 수 있음에 만족했다. 그래서인지 여유자금이 생기자마자, 집에 찢어진 침대를 구매하는 것보다, 돌아가신 시할머니의 묘를 어떻게 리모델링할지를 고민하셨다. 산 사람이 충분히 만족해야 죽은 사람을 들여다본다고 했다.
엄마는 시부모님과 달랐다. 본인의 삶에 만족하지 못했다. 힘든 삶을 사는 본인을 동정했다. 어느 날 꿈에 나온 할아버지에게, 나 데려가 주면 좋겠다고 했다고. 그 얘기를 딸인 나에게 했다. 그런 엄마의 감정들이 넘쳐서 내게 올 때마다, 나는 죄책감에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