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양해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려, 책임감에서 도망치다.
고등학생이 되자, 내가 하고 싶은 걸 조금 덜 하더라도 엄마가 웃어야 내 숨통이 트일 것 같아졌다.
"엄마, 자식에게 헌신하는 인생 말고 엄마가 즐거운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어."
엄마는 슬프게도,
"이제 어떻게 해야 즐거운지 잘 모르겠어. 너희들 잘 크면 그걸로 족해."라고 했다.
그 대답 덕분에 계속 엄마에 대한 책임감이 나를 더욱 짓눌렀다.
엄마의 결혼 생활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늘 아빠와 싸우던 엄마에게 이혼하는 건 어떠한 지 수 차례 물었다. 내가 결혼할 때 흠결로 잡힐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결혼 따위 하지 않아도 되니 이혼이 엄마가 행복해지는 길이라면, 그 선택을 하기를 바랐다.
결혼할 때까지도 아빠는 변하지 않았다. 당연히 대학 학비며 생활비는 직접 벌었다. 이후에 내가 연봉을 꽤 받는 직업군에서 일하고 있었음에도, 집에 동생 병원비며, 생활비를 보내느라 결혼 전까지 적금을 한 푼도 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결혼 전 할머니에게 인사하러 갔을 때 할머니는,
"너희 친정은 밑 빠진 독이야. 여기에 물 붙지 말고 네 살길 살아.
그러다가 독을 하나 더 살 여유가 생기면, 그때 작은 독이라도 엄마를 사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거야.
너한테도. 너희 엄마에게도."
그 얘기를 듣고서 엄마 아빠에게 더 이상 생활비를 더 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빠를 남편에게 소개하기가 싫었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면 지금보다는 덜 의존적으로 생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처음에는 변하는 것 같았다. 택시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일을 하지 않았어도, 자격증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가능했던 직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덜거렸다.
여러 손님들의 양상에 대해서 불만을 토해내나 싶더니 점점 근무 시간이 짧아졌다. 당연히 사납금을 내고 나면 손이 쥐는 돈은 푼돈이었다. 그러더니 디스크가 와서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디스크가 와서 일은 못 나가지만, 좋아하는 운동도 하고 술도 마실 수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하는 노동의 가치는 늘 폄하했다.
엄마에게 여전히 엄마라도 독립하라고, 이혼하는 건 어떤지 물었다. 이번엔 내가 양쪽을 다 보살펴야 돼서 힘들 거라고 했다. 이번에도 내 핑계였다.
이제는 안다. 엄마가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는 걸. 지금 있는 곳이 지옥불이어도 이미 적응된 지옥불이지만, 한 발만 내디뎌 따뜻한 바닥으로 와도 엄마에게는 차갑게 느껴질 거라는 걸.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살기를 선택했다는 걸 안다.
나이 서른이 지난 지금, 이제는 엄마의 책임감들이 나를 더 이상 누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가 자랐다는 걸 안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선택들이 엄마처럼 살지 말지를 결정할 기회인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 불구하고, 엄마처럼 사는 순간들을 마주한다.
엄마가 노동을 하고 돌아와서도 집안일을 했던 것처럼. 나는 남편이 항상 원하는 옷을 언제든 입을 수 있도록 다림질해 놓은 상태로 유지한다.
신발은 늘 먼지가 털어진 상태로, 냉장고를 열면 원하는 음식이 있는 상태로,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을 할 수 있는 상태이다.
누군가는 나의 집을 방문해 모델하우스 같다고 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채우면서 나의 결핍을 채우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은 나에게 책임감이 과중하다고 했다. 세상 모든 짐을 자신이 다 지고 가는 양. 엄마가 말했던 대로 나 역시도 어떻게 살아야 즐거운지 잘 모르는 어른이 되었다.
살고 싶은 집을 그리라고 하면, 빌딩 한 채에 할머니 집과 엄마 집, 내 집을 그리던 어린아이는 모두를 챙겨야 할 짐을 한가득 진 어른이 되었다.
책임감을 지기에 1-20대는 어리다. 나는 그 시절, 소리만 지르는 아빠로부터 여린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고, 동생을 데리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매 순간 엄마가 아빠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지 않았기에, 나만 독립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오래도록 마음에 눌러앉아 있었다. 그렇게 책임감을 배우기 시작해야 하는 나이 서른이 올 즈음, 나는 결혼을 통해 집으로부터 도망쳤다.
엄마 역시도 할머니를 부양하는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선택으로 결혼을 선택했다. 마당에 분수도 있는 대궐 같은 저택에 사는 남자를 골랐다. 그것이 사상누각인 걸 알기도 전에, 이미 아이는 생겼고 결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결국에 같은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