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격'을 읽고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작가는 난쟁이의 일화로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을 설명한다. 힘센 사내에게 던져짐으로써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난쟁이가 있다. 작가는 난쟁이를 보며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분노한다. 하지만 난쟁이는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고 나의 결정 또한 나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항변한다. 결정의 자유는 존엄성의 필요조건이다. 그렇다면 충분조건도 될 수 있을까?(P35).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통해 사물은 쓰임에 따른 탄생의 목적이 있지만, 인간은 삶의 목적 없이 태어나기에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야 함을 주장했다. 난쟁이가 타인에게 던져지는 행위는 결정의 자유라는 존엄성의 필요조건은 만족했지만, 던져지는 사물이 됨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타인에게 양도한 것이다.
조금 더 확장해 본다면 자신의 검열 기준을 어떤 단체나 지도자 같은 외부 기관에 양도하는 것 또한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다. 그 자신이 검열기관이 될 때는 검열과 충동의 분쟁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지만 외부로 이관되면 그와 지도자 사이의 충돌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자기가 스스로 나서서 타인을 후견인으로 삼는, 존엄성을 완전히 상실하는 행위이다.(p89)
나는 난쟁이의 선택에 돌을 던질 생각은 없다. 생계를 이어 나가는 것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 비록 생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존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는 스스로를 포기했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만남에서의 존엄성은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작가는 먼저 갈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갈등은 회피하거나 침묵하면 점점 커져 결국 자신의 존엄마저 해칠 수 있다며 경고한다. 그러니 명확히 밝히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미래는 열어주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선 고정된 기대 안에 그를 가두지 말고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대우해야만 한다고.
또한 오래된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도 빼먹지 않는다. 조금의 변화도 없이 언제나 똑같이 살아가는 것은 관계를 해체시키는 비 존엄적 형태라고 경고하며 타인과 나 스스로에게도 열린 미래를 허락함으로써 진실하고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결국 만남으로서의 존엄성이란 인간관계를 통해 내가 변할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와 필요하다면 그 관계를 끝낼 수도 있다는 각오를 지닌 채 타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며 열린 미래를 허락함으로써 진실하고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상적인 주장이지만 이것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기본적으로 위험을 회피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경향 즉 유사확실성을 추구한다. 결국 모든 일을 제어하려고 든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타인을 소유하고 제어하려 한다. 자신의 범위 안에 두는 것, 그럼으로써 불안감을 없애는 것.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가 얘기하는 타인의 열린 미래를 존중하는 것은 본능을 역행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서로에 대해 의식적인 노력이 더더욱 필요하다.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
타인과의 관계에서 사적인 영역을 얼마나 둘 것인가 하는 것도 존엄성을 지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거리가 좁을수록 서로를 잘 알고 있으니 서로를 더 존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이가 유리처럼 투명하다면 친밀감이 존재할 공간은 없다. 사적인 영역이 전혀 없이 투명함만을 강요하는 관계는 서로를 질식시킨다. 상대방을 속속들이 알아내려 하는 것은 관계의 유효기간을 앞당기기만 할 뿐이다.
상대방에 대한 매력은 그가 가진 은밀한 비밀상자에서 나온다. 내가 알지 못한 낯선 그의 모습. 그렇게 시작되는 호기심이야말로 서로의 관계를 발전시켜 주는 묘약이다. 상대방의 사적이 영역을 지켜주면서 각자 스스로는 낯선 감각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지속적인 관계의 마법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마법 어딘가에 서로를 향한 존엄성이 자리 잡고 있다.
[진정성으로서의 존엄성]
진정성에 대해 작가는 ‘삶을 기만하는 거짓말은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존엄성을 부식시킨다. 어떤 행위와 경험을 겪을 때 우리 자신이 진정한 존재가 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또 ‘삶의 기만은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살아갈 기회를 망쳐버린다’고 말한다.
존엄성 안에는 그 사람이 가진 특유성도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 속에는 그 사람 특유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 안의 진정성을 굳건하게 함으로써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자아 존중으로서의 존엄성]
자아상을 알기 위해 자아의 범위를 정의하여야 한다. 작가는 ‘그 범위에 대해 타인에 의한 한계선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스스로 그은 경계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 자아상은 ‘특정한 배경과 문화적 조건을 토대로 만들어졌으며 언제든지 변화가 가능한 내적 기준이다’고 덧붙인다.
즉 자아의 범위는 특정한 배경과 문화적 토양 위에 본인 스스로가 그은 경계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경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다.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과거의 나를 부정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세월을 지나면서 변화하였고 과거의 나는 내가 아니라 현재의 나가 진정한 나라고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나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존엄성을 해치는 일이다. ‘과거의 흐르던 삶의 가락이 현재의 가락이 된 것’처럼 과거의 내가 있기에 현재에 나 또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과거의 나의 모습도 이해하고 인정을 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나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나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다.
[도덕적 진실성으로서의 존엄성]
타인의 욕구와 이익을 나 자신보다 우선시하는 것, 그것 또한 존엄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어려운 처지의 타인을 보며 나 자신의 이익보다는 그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도와주는 행위. 그러한 생각과 행동에는 그들과 나는 서로 다르지 않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나도 그들과 같이 힘든 환경에 놓일 수 있었고 그들처럼 세상에 미끄러질 수 있었다. 그들의 불행이 내 몫이 될 수도 있었다.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가 정한 기준에 따라 타인의 욕구를 우선 추구하는 것. 이것 또한 나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방법 중 하나이다.
[사물의 경중을 인식하는 존엄성]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정한 중요도의 기준으로 일의 경중을 따져보고 시간과 에너지를 분배한다. 한 곳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고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잡았던 것을 놓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면 존엄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일에 매여 노예로 사는 삶을 경계해야 한다. 깊은 감정을 경험하지만 그 일이 가진 의미를 무한대로 키우지 않고 일정 선에서 그치게 하는 능력 그것이 균형 잡힌 삶을 이루게 한다.
‘8월 2일. 독일이 러시아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오후에는 수영 강습’ 전쟁이 일어났지만 수영에 대한 마음에 대한 균형을 지키는 자세.
나는 특히 이 부분에서 질투와 존경심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나를 보고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면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시간을 흐르는 것을 멍한 상태로 바라만 보았다. 그렇게 허비한 시간이 많았다. 어쩌면 그렇게 허비한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나머지 시간을 빈틈없이 보내려 그렇게 애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비효율적인 시간만을 보내다 삶을 허비해버렸다. 손해 보지 않으려 했고 호구가 되기 싫어 많은 기회와 도전을 흘려보냈다. 살면서 느낄 수 있었던 다양한 경험을 느끼지 못했다. 풍요롭고 다채로운 삶을 살고 싶었지만 안전한 집 주변만 빙빙 돌며 작은 인생을 살았다. 균형 잡힌 인생이야 말로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삶이자 나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다.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삶에는 유한함이 있다. 삶의 마지막 장을 맞이할 때 타인으로부터 나의 존엄성을 잘 지켜내야 한다. 신체와 정신은 늙어감에 따라 판단이 흐려지기에 나의 죽음을 타인에 손에 맡겨야 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부정적이다. 존엄성보다는 생명의 연장을 가장 높은 가치로 판단한다. 몇 달 혹은 몇 년. 지독한 고통과 맞바꿔 연장한 시간을 병원의 침상에서 보내는 것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까 삶의 종착지에서 마지막을 가장 나답게. 내가 추구하는 존엄의 기준에 따라 마감하는 것이 아름다운 퇴장이 아닐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의미의 과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존엄성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세부 주제들 또한 깊고 큰 의미들이다. 그러한 의미들이 다양하고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보니 전체적으로 소화가 되지 않는 느낌이다.
소설과 같은 경우 한 가지의 주제를 이야기로 다루어 낸다. 이야기로 풀어낸 주제는 큰 공감과 깊은 여운을 남긴다. 하나의 큰 울림은 마음속에 새겨져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그 의미를 곱씹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존엄성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깊은 울림으로는 다가오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윤리를 공부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생을 살아가면서 주기적으로 깊게 고민해 봐야 될 문제를 놀라운 통찰력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책을 보는 내내 각각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존엄성이 많이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쟁이의 이야기부터 테러범의 비행기에 관한 이야기, 죽음을 앞둔 환자 이야기까지. 각자가 살아온 문화와 배경이 다양한 것처럼 추구하는 존엄성의 색깔은 다양했다. 그들의 각각의 추구하는 존엄성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도 누구의 말이 옳은지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존엄성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고 정답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발견한 개념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법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고 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법 또한 인간이 최소한으로 지킬 규범을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개념이다. 그리고 법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변화해 왔다. 결국 존엄성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 정의 내리기 어렵고 따분하다고 멀리하거나 외면해선 안된다. 그것이 다루기 어려운 문제라고 치부하며 미루어 두는 순간 우리의 존엄성은 사라진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 한, 그리고 언제나 경청하며 논쟁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참여하는 한 우리의 존엄성은 절대 손상되지 않는다. 존엄성의 손상은 입이 단단히 봉해질 때 이루어진다. (P45)
책 초반에 쓰여진 위 글처럼 우리는 외부의 위협으로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하고 토론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를 지키는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