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앙가주 Nov 02. 2022

별이 있는 밤은 결코 어둡지 않다 - <밝은 밤>

‘밝은 밤’을 읽고


  지원한 회사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기쁨보다 홀가분함이었다. 지루하고 고단한 취업 준비 과정이 이제야 끝났구나 하는 안도의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대개 그렇듯이 회사 생활은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다. 나의 상식과는 달리 회사 내에선 그 어떤 것도 전체의 이익보다 우선시되지 않았고 개인의 인격 또한 돈이 되지 않으면 무시당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응해야 했고 무너지면 안 된다고 나를 다그쳤다. 

  때때로 견디기 힘든 무력감이 찾아올 때면 책에 관한 라디오 방송을 듣곤 했다. 책을 좋아했지만 여유시간이 많지 않아 선택한 방안이었다. 한 번은 최은영 작가가 출연했다. ‘쇼코의 미소’라는 책에 대해 리뷰도 하고 궁금한 점에 대해 작가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다. 방송을 듣다 보니 그 책에 관심이 생겨 구입해서 읽어 보았다. 흡인력이 뛰어나 몰입해서 한 번에 읽기 좋은 작품이었다. 특히 여성의 서사에 대해 잘 다룬다는 느낌을 받아서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생각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시간은 성실하게 흘러갔고 나는 그 시간 안에서 치열하게 일했다. 나는 언제나 회사 일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상사들의 요구는 점점 늘어갔고 일에 대한 압박감은 더욱 심해졌다. 회사는 나를 한 개인이 아닌 부속품으로 취급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점점 지쳐갔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동심원 같은 일상만 반복하고 있었다. 목적 없이 버티기만 하는 삶은 어둠만 가득 찬 터널 같았고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그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암흑과도 같은 이 터널 속에 갇혀 내 삶을 영영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고통스러운 불안감을 밀어 내려 주변에 조언을 구해보기도 하고 상담을 해보기도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혼자 고심했다. 그리고 결국엔 퇴사를 결정했다. 
  힘든 결정을 내린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미뤄두었던 책을 읽는 것이었다. 긴 시간을 굶은 후 한 번에 음식을 먹어치우는 사람처럼 나는 책을 읽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서점에서 ‘밝은 밤’을 만났다. 최은영 작가의 작품이었다. 순간 나는 긴 시간을 돌아 그녀와 다시 조우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바로 책을 구입해서 읽어 보았다. 나는 책의 초입부터 단숨에 빠져들어 내리읽어버렸다. 기대보다 훨씬 좋은 책이었다. 등장인물 각각의 개성과 사연이 잘 살아있고, 각자의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의 연대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주인공 지연에게는 깊은 동질감이 느껴졌다.
  지연은 외도한 남편과 이혼 후 새로운 직장을 구해 희령으로 이사를 간다. 그녀는 희령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생각한다.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 더미처럼 느껴진 것은....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돌이켜 보면 나의 인생 또한 나의 존재가치를 남들에게 끝없이 증명했던 시간들로 채워져 있었던 거 같다. 나는 어떤 부탁에 대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나의 시간을 잘라내서 그들에게 내어주었다. 그 대가로 받는 그들의 관심이 나는 좋았고 언제나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버려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심장 옆에 붙어살아 숨 쉬었다. 그럼에도 불안이 나를 성장시킨다고 나는 믿었다. 불안을 발판 삼아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나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그건 빗나간 예측이었다. 나의 발밑에서 나를 받쳐 줄 것이라 믿었던 불안은 오히려 입을 벌려 나를 삼켜버렸다.
  불안에 잠식되어 힘든 나날을 보낼 때면 종종 부모님을 뵈러 갔다. 부모님의 얼굴을 보고 같이 밥을 먹으며 고민을 얘기하면 작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의 아픔보다는 단체생활을 강조하셨고, “너만 힘든 게 아니다. 투정하지 마라. 너처럼 다들 힘들다고 하면 사회가 어떻게 유지 되느냐”며 말로 매질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당신이 그렇게 살아오셨다고 그런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건 불합리하고 폭력적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맞서고 저항했다. 우리는 서로를 비난했고 그러다 점차 멀어졌다. 
  지연의 엄마도 그녀에게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그녀의 엄마는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그냥 너 하나 죽이고 살면 돼.’라며 굴욕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패배감에 젖은 말들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감내하면서 그런 방식을 강요하는 엄마에게 그녀는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지연은 희령에서 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엄마와 할머니의 암담했던 삶에 대해 알게 된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딸을 키워내야 했던 할머니 곁에서 엄마는 온전한 부모의 보호 없이 매 순간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약자에게 조금의 배려도 허락하지 않는 지옥 같은 사회에서 어린 그녀는 책잡히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괴롭힘 당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견뎌냈다. 그런 그녀에게 세상은 대항하거나 맞서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피하고 감내해야 할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엄마가 살아온 험난했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지연은 그제서야 엄마에 대한 이해와 위로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분노가 왜 늘 엄마를 향해 있었는지 고심해 본다. ‘왜 분노의 방향은 늘 엄마를 향해 있었을까. 엄마가 그런 굴종을 선택하도록 만든 사람들에게로는 왜 향하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정말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내 생각처럼 당당할 수 있었을까. 나는 엄마의 자리에 나를 놓아봤고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할 수 없었다.’
  지연 자신이 엄마와 같은 환경에 자라났다면 엄마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말하는 부분을 읽었을 때 내 몸 어딘가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사회 전체의 성장을 위해 개인의 개성과 감정은 잘라내라고 강제했던 시대를 살아오신 아버지였다. 나는 그 폭력적인 시대에는 분노하지 못한 채, 내가 자란 시대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손쉽게 판단해 버렸다. 뒤돌아보면 아버지와 나는 개인이 어쩔 수 없었던 서로의 시대 상황은 깊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그저 각자가 가진 창으로 서로를 찌르며 상처 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연이 엄마에게 그랬던 거처럼 나도 아버지가 자라온 환경에 나를 가만히 놓아 보았다. 아버지를 향해 당신밖에 모른다고 나라면 저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 소리치며 살아왔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확신은 나의 오만이었다. 당신이 자라온 환경에 내가 놓여있었다면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해를 시작했다. 
  지연과 엄마(미선), 할머니(영옥), 증조할머니, 새비 아주머니 그들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과 독재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시대에서 주어진 방식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았다. 힘든 시간 동안 서로를 아끼고 의지하며 버텨냈지만 살아온 시대가 다른 만큼 관계는 삐걱거리고 때론 충돌하기도 했다. 새로운 시대는 이전 시대의 방식을 부정하고 해체하면서 등장하기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세대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고, 가끔은 서로를 비난하며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중 어떤 상처들은 각자의 가슴속에 깊게 새겨져 방치된 채 계속 자랐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살기 위해 그 상처들을 가슴 깊은 곳에 눌러 놓은 채 고된 시간들을 견뎌냈다. 그리고 마침내 희령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었고 오래된 상처를 치유했다. 
  책을 보는 내내 상처받지 않고 산다는 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심해지는 사회적 갈등, 가속화되는 부의 양극화. 내 것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는 이기주의가 범람하는 지금 이곳에서 그 질문에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상처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숙명이 되어버린 시대에 그럼에도 살아내기 위해서는 늦지 않게 위로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던 지연에게 친구 지우가 위로하며 해주었던 이 말처럼 서로에 대한 조건 없는 애정과 늦지 않게 도착한 위로로 우리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아프면 곁에서 걱정해 주고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그 사람의 감정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우리는 서로를 그런 온기로 품어 주어야 한다. 매번 상처받는 인생에서 조건 없이 나를 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어둠만 가득했던 터널 같은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과거의 나에게도 위로가 되어 줄 누군가 있었다면, 사회에서 튕겨져 나오지 않았을 텐데라는 짙은 아쉬움이 책을 보는 내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인가라고 자문해 보기도 했다. 이미 지나온 과거를 뒤로하고 앞으로는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조건 없는 위로를 건네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도 위로받으며 살고 싶다. 그렇게 서로에게 위로를 전하고 위로받으며 산다면 힘든 삶 속에서 가끔은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지연이 천문대에서 어두운 밤하늘의 밝은 별을 바라보듯,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밤과 같은 인생에서 밝은 별이 되어줄 위로를 찾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도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넸으면 좋겠다. 위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삶은 결코 어둡지 않다. 또한 별이 있는 밤도 결코 어둡지 않다. 그 밤은 밝은 밤이 된다. 

작가의 이전글 존엄성의 다양함 - <삶의 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