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살자 뭐 어때 tlqkf.
오늘은 클라이언트와 정기 주간 화상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오후 12시에 시작해 3시가 넘어서야 끝난 기나긴 회의. 끝날 것 같으면서도 다시 또 말의 물꼬가 트고, 마무리가 될 것 같으면서도 얇은 말 줄기가 사라지지 않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중 자연스레 북마크 탭에 놓인 브런치를 눌렀다.
언젠가 하루를 꼬박 무기력증에 빠져 밥도 일도 미루고 어둠이 올 때까지 캄캄한 방에 누워있었던 날이 있었다. 그 와중에도 종일 쉬었던 덕분인지 밤이 되니 정신이 말똥 해지고 몸도 가벼워져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브런치에 무기력에 대한 내 소견을 이러쿵저러쿵 적어두고 (대충 무기력증을 해소하겠다는 다짐)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 당시 내 감정을 뱉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글이었지만 발행을 누르기까진 한참 모자란 멋짐이었다.
내 글 서랍엔 당시 쓰고 싶었던 이런저런 소재의 쓰다만 글과 정리안 된 단상의 조각들이 여럿 있었다. 왜 딴짓할 땐 집중도가 향상되는 걸까? 오늘 중 서랍 속 글 하나는 무조건 정리한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고 어서 회의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어느덧 회사 밖에서 일한 지 2년 3개월이 지났다. 아무튼 난 요즘 머리도 마음도 골고루 쓰며 바쁘게 보내는 중이다. 여전히 재택근무 기반이라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지만 2년 내 가장 큰 변화라 함은 함께하는 팀원이 2분이나 생겼다는 점이다. 덕분에 숙원사업이었던 개인 쇼핑몰도 오픈했고, 무엇보다 본업을 더욱 잘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2년 전 꽤나 긴 시간 동안 심한 우울감에 빠졌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나의 하루는 많이 밝아졌다. 괜한 것에 슬프지 않고 하루 중 불안감을 느끼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참 좋은 나날이다.
참, 2019년 아늑한 우울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문득 내 뇌리에 박힌 강한 깨달음이 있었는데.
'내가 느끼는 이 어두운 감정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고, 다신 아무 걱정 없이 밝았던 이 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였다. 물론 당시 상황으로 보아, 한 쪽으로 치우친 감정을 인지했음에도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은 깨달음이었다. 실제로 위 사실을 받아들인 후 나는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현실을 직면하고 기대치를 낮추었기 때문이다. 현 능력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 작은 허들을 세워 나가며 2년 동안 작고 귀여운 장애물을 많이 넘겨왔고 지금도 나의 그릇에 적당한 허들을 넘는 중이다.
그리고 2년 전 느꼈던 강한 충격은 여전히 내 삶 속 구석구석에서 숨 쉬고 있다. 이는 때때로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주기도 하지만 간혹 '무기력'이라는 것으로 나타나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무기력' 이거 단어 자체가 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어떻게 해쳐나가야 할지 감이 안 올 정도로 처음 겪는 상황을 마주할 때에 무력함을 느끼곤 한다. 보통 여러 집단에서 발현되는 작고 큰 인간관계서 부터 내 집 마련 또는 그 달 수입에 관계없이 빠져나가는 고정비 지출 따위까지.
내게는 무기력이 찾아올 때 늘 가위를 눌리기 바로 직전처럼 싸한 느낌의 징조가 있다.
대게 늦은 아침.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늑장을 부리는 아침 시간이다. 분명 어젯밤 잠들기 전, 업무 시작 2시간 전에 일어나 내가 이끄는 하루를 만들자 다짐해놓고 결국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시간에 억지로 몸을 세운다.
사실상 피곤에 절어 잠을 푹 잔 것도, 또 2시간 전에 분명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혼수상태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시간을 개겨보낸 오전은 이불 위를 덮는 따사로운 햇살에도 불구하고 땅 밑으로 꺼져버리는 기분이다.
"아 몰라 짜증 나, 다 끝났어."
내 문제는 꼬라지를 쓸데없는 것에 부리는 것이다. 눈도 떴고 더 이상 졸리지 않지만, 여전히 저 밑 폐 혹은 간 즈음 고인 짜증 때문에 몸을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
핸드폰을 쥐고 밤 사이 업데이트된 피드를 멍한 눈을 한 채 엄지손가락을 올려대거나 넷플릭스를 켜 아무 콘텐츠나 본다. 그렇게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면 어김없이 현실 자각 타임이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나는 2시간 전에 일어나지도 못하는 못난 인간이야. 내 꼬라지로 또 쓸데없이 핸드폰만 보다가 2시간을 날렸어.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정말 화가 난다.. "
그니깐 나처럼 하고싶은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많은 인간은, 나 자신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괜한 승을 내곤 한다.
그냥 포기하던가 아니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던가 이도 저도 안되고 회로가 막혀버리는 순간엔 꼭 무기력감이 찾아온다. 그리고 흘려버린 시간에 하지 못했던 '계획'에 미련을 두어 열망을 키우곤 한다. 대게 운동, 독서, 그림, 글쓰기와 같은 자기 계발이다.
나는.. 유튜브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n년째 안 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 다이어트해야지라고 다짐하고 떡볶이 시켜먹는 부류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어이가 없는 건 무기력 무드가 깨지는 순간이다.
어둠속으로 꺼지던 찰나 우리 집 강아지의 심한 코골이 소리에 놀라 실소를 퍼트리거나,
갑자기 어제저녁으로 먹다 남은 치킨을 데워먹고 싶은 기분이 들거나,
어제 온 택배가 생각나 빨리 옷을 입어보고 싶다거나,
또 가끔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정말 자신이 안타깝고 슬퍼서 눈물이 나기도 하는데 눈물을 흘리는 나 자신이 너무 웃겨서 웃음이 터지며 무기력 타임이 펑하고 끝난다.
하.. 정말 하찮지 않은가? 저렇게 작고 하찮은 이유를 '무기력'이라는 거창한 단어로 부풀렸다.
잘 브랜딩 된 '무기력감'은 쓸데없는 책을 구매하게 하거나 무엇에 의존하지 않으면 치유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을 준다.
가볍게 여기자. 뭐 어때 tlqkf
무기력 무드가 깨지면 다음일은 일사천리다. 발로 이불을 펑차고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침대를 정리한다. 거실로 나가 좋아하는 BGM을 깔고, 강아지 배변패드를 치우고 빨래를 널거나 설거지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커피를 한 잔 내려 책상 앞에 앉은 후 열심히 일한다 또 일한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는지 내 문제 하나하나를 너무 깊고 무겁게 대했다. 작은 것에도 쉽게 실망하고 더 잘하고 싶었다.
가벼운 사람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은 가벼워질 필요가 있다.
좀 대충 대답해도 되고, 좀 게으르고, 좀 안 멋지면 뭐 어때요. 나처럼 게으른 완벽주의자라 스스로 책망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가끔은 '아 몰랑' 하자.
부담감을 느끼며 마음을 무겁게 해야만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를 저지르거나 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라 의심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거나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허들을 넘어야 할 때, 그것이 무엇이든 내 일상에 자리잡기까지 예민해하고 불안감을 느끼도록 스스로 부추기곤 한다.
그래, 성격이다. 반은 못 고치고 반은 고쳤다.
요즘은 의미 부여하지 않고 가볍게 대하려고 한다. '아 몰랑'의 가벼운 마음은 불쾌한 무드를 금방이고 깰 수 있고 괜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환기된 기분은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하고 가짜와 진짜 문제를 가려내 주기도 한다. 그러면 어느새 기분이 좋아져 나는 다시 또 내일 아침을 미라클 모닝을 약속한다..
“나 내일은 정말 일찍 일어날 테다. 하지만 혹여나 또 내 자신을 실망시키는 일을 범한다면 그땐 '아몰랑'시전으로 이불을 박차고 나와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