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아닌 다른 일

by 걱정인형

첫 출근 날, 시간과 약속을 잘 지키는 내 신념대로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내가 배정받은 자리의 사무실은 네 개 중 가장 끝 쪽에 있었다. 팀장님이 가장 넓은 책상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직원들의 책상이 마주 보게 놓여 있었다.

팀장님은 내가 앉을자리를 알려준 뒤, “업무 알려드릴게요”라며 자신의 자리로 오라고 했다.

나는 작은 보조 의자에 앉아 수첩을 꺼냈다.

팀장님은 메모장에 적어둔 주의사항을 하나씩 짚어가며

실제 프로그램 화면에서 작업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하나라도 놓칠까 봐 화면을 바라보며 기억해야 할 내용들을 열심히 적었다.

설명이 끝날 무렵,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 메모지 숙지사항…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팀장님은 쿨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이거 뽑아서 드릴게요.”


내 업무는 오래된 자료를 디지털화하기 위해 스캔된 이미지를 기준에 맞게 정리하고 보정해 나가는 일이었다.

10년 넘게 디자인을 해왔지만 이미지 보정 작업은 낯설었다.

기울기를 맞췄다고 여긴 순간에도 자료마다 폰트와 질감이 달라 다시 보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이미지 상태가 고르지 않은 경우도 있어 어디까지 살리고 어디까지 잘라야 할지 매번 판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끔 팀장님께 불려 가 수정 지시를 듣기도 했자. 그럴 때마다 작업 기준과 예외 사항을 메모장에 다시 적고 마지막 점검 전에 그 메모를 꼭 확인했다.


작업방식은 디자인과 비슷하지만 성질은 완전히 달랐다.

이 일에는 명확한 정답이 있었고 정해진 규율만 지키면 문제없이 마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디자인을 하며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는 정답을 맞히기 위해 수없이 바꾸고 또 바꾸던 과정에 지쳐 있었던 나에게 이 ‘정답이 있는 일’은 의외로 숨통을 틔워주는 경험이었다.

여러 직업을 소개하는 유튜브 콘텐츠를 보며 ‘나도 하루만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 새로운 업무는 그 갈망을 잠시나마 해소해 주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뜻밖의 면접, 뜻밖의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