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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화 Oct 14. 2024

신중하고 정중한 언어의 시간

#면접후기 #원티드 #글쓰기챌린지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방인>, 알베르 카뮈)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 프란츠 카프카)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일리아스>, 호메로스)


소설 이론에서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결론이나 핵심을 언급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주곤 합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 처럼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그런 채용공고였습니다. 

첫 문장에 정체성이 명확하고 쉬운 언어로 규정되어 있는 회사였어요. 제가 남자친구와 대화하면서 특히 더 심하게 물고 늘어지던 요소에 대해 다루는 곳이라 바로 눈이 갔죠. 무척 깔끔하고 명확한 회사 설명, 해야 하는 업무와 자격, 필요한 내용, 면접 방식 등에 대해 군더더기 없이 적혀 있는 공고를 몇 번 반복해서 읽었어요. 서류를 지원하고 면접 꼭 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며칠이 조용히 지났어요. 이메일과 문자를 받았습니다.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해보자고요.


이메일도 신기했어요. 

제 이력서에 대해 자세하게 읽었다는 듯 이력서에 대해 요약하고 어떤 부분이 궁금한지, 어떤 부분에 대해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싶은지 기재되어 있었어요. 가능 일정, 장소, 기대하는 바, 만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가 모두 함께 말이에요. 상냥하고 정중한 이메일이었습니다. 이런 이메일 없이 바로 ATL을 통해 일시와 장소만 정해지는데 장소가 카페였다면 조금 더 긴장됐을 거에요. 그리고 망설여졌겠죠, 이게 맞는 건지를요.


뜨거운 햇볕이 이글이글 내려쬐는 여름이었어요. 

늘 면접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해 그 동네를 구경하곤 했어요. 이 날도 그랬습니다. 양산을 든 채 느긋하게 동네를 구경하며 이동하던 중에 문자를 받았어요. 이미 도착해서 카페 어디에 있으니 천천히 오라고요. 어색하게 커피를 주문한 채 기다리지 않아도 됐던 거죠. 느긋하게 이동해서 커피를 주문하고, 받아서 올라갔어요. 1분 자기소개를 다시 연습하면서요. 목재로 꾸며져 있는 카페 1층에서 음료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어요. 2층 계단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계셨어요. 헤맬래야 헤맬 수가 없는 위치였죠. 계단 바로 앞이었지만 손님이 거의 없는 곳이었고 사장님은 아래층에 계셨어요. 사장님께 제가 어떻게 보일지, 제가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위치였습니다.


이메일과 문자를 먼저 보고 직접 뵌 면접관은 이메일의 의인화 버전이었어요. 

강아지들은 다른 강아지와 놀고 싶지만 상대가 겁을 먹을 것 같으면 엎드려서 조용히 기다려준다고 해요. 이메일에도 다양한 웃음 표시가 등장했는데 제게는 그런 시그널 처럼 느껴졌어요. 실제로 만난 분도 딱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범주가 큰 질문도 구체적인 질문도 받았지만 제가 당황스러워하거나 너무 힘들거나 어려워할 법한 질문은 없었어요. 저에 대해 많은 걸 이야기하고 말씀해주신 부분에 대해 여러 질문을 드렸지만 아주 매끄럽고 부드러웠어요. 나도 이렇게 대화하는 어른이 될 수 있을지 감탄하곤 했답니다.


편안한 대화는 모든 정보와 의견을 투명하게 공개한데서도 영향을 받았어요. 현재 회사의 상황, 주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프로세스와 기준, 앞으로의 비즈니스 모델을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어요. 이 회사에 입사할 경우 제가 얻어갈 수 있는 것과 잃을 수 있는 기회, 일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누구와 일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공유해주셨죠. 게다가 마지막에는 보상에 대한 부분까지 투명하게 오픈 되었어요. 면접 전부터 이미 꼭 면접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사람인 저는 살살 녹았답니다. 이렇게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가시다니요?


우리, 면접을 보고나면, 김칫국을 일단 끓이잖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만약 합격하면, 그럼 입사하는 게 맞는 걸까?

제가 어려워하는 부분, 제가 그동안 해왔지만 더 잘 해야 하는 부분이 모두 섞여 있었어요. 게다가 4년여를 한 장소에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다가 새로운 터로 이식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컸죠. 빠른 시간 안에 내 몫을 다해야 하고, 또 그런 구성원이 되고 싶다는 욕심도 무척 컸어요. 제가 일을 하는 목적, 일이 더 잘 되도록 지원하고 몰입을 유도하는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것, 그래서 우리가 각자 또 같이 성장하는 지향점에도, 그리고 제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늘 물고 늘어지는 포인트를 다룬다는 점도 좋았어요. 하지만 도전이었죠. 그래서 저는요, 김칫국을 마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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