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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나요, 나?

by 승화

2025.02.21.

데스커라운지 thinkers party

ECIFF * 데스커라운지의 세션

(https://www.instagram.com/p/DF42kn0vH4z/?igsh=MW9xbzA2N3Y5MTE2MQ==)



일을 통해, 일로 인하여 행복하신가요? 성장하고 있나요? 왜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나요?

이 질문은 거대합니다. 하나씩 긴 대화가 필요한 요소입니다. 철학은 태초부터 이런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고, 나름의 답을 찾아온 분야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거대한 질문을 보자마자 목이 메고, 무엇이든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든다면 딱 필요한 세션이었죠. 그래서 바로 신청했고, 운 좋게 선정되었어요.


이전 일정을 마치고 데스커라운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파티가 시작된 뒤였어요. 러쉬 경력자인가 싶게 활짝 웃는 데스커라운지 직원과 먼저 마주쳤습니다. 직장 만족도가 아주 높게 느껴져서 저도 입사하고 싶어질 만큼이었어요. 그분의 안내에 따라 다짜고짜 제비뽑기통에서 연필부터 뽑았습니다. 투명한 통이지만 글씨가 작아 뭘 뽑는지 모르고 서둘러 하나를 집어 들었죠. 그리고 저는 가장 앞에 위치한 플라톤 조로 들어갔어요.


총 다섯 개 조는 각기 다른 철학자, 그리고 그 철학자의 핵심 화두에서 도출된 각기 다른 질문을 세 개씩 가지고 있었어요. 오늘의 이벤트를 주최하고 진행하는 LMNT의 구성원이 각 조에 한 분씩 자리해 모더레이터로 대화를 유도하고 활성화했습니다. 첫 시작은 해당 철학자의 일평생과 이론에 대한 소개였어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라고 인식해, 질문과 대화를 통해 진리에 이르려고 시도했어요. 정말 모르니 알려달라는 자세로 다가간 덕에 스스로의 모순과 무지를 깨닫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걸 깨달아 기뻐하는 자와 깨닫게 한 사람을 증오하는 자가 모두 존재했죠. 소크라테스는 참된 앎을 가졌다면 덕을 실천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고, 그의 기준에서 악행은 무지에서 나오는 산물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참된 앎, 선한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문답을 나눴어요.


하지만 역시 기록은 필요합니다. 기록이 없으면 후대로 이어지지 않고, 알려지지 않아요.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흠모했던 제자 플라톤이 등장하죠. 플라톤은 스승과 나눈 대화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 등이 있어요.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진리에 대한 사상을 발전시켜 이데아론(이상적 본질, 절대적 진리)을 주장했어요. 플라톤에게 진리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단, 하나입니다.


플라톤에게 정의는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회가 조화롭게 운영되기 위해 각자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이를 위해 사회가 그에게 교육과 지식을 주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때 내가 나의 역할을 수행하는 건 단순히 생계를 위한 행동을 넘어 우리가 갖춰야만 하는 덕입니다. 그러니 참된 인간은 덕과 지식이 있는 인간인 셈이지요.


그래서 플라톤 조에서는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내가 쌓고 있는 덕과 지식은 무엇인지, 내가 조직과 사회에 무엇을 기여하는지에 대해 정의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일. 나의 역할에 대한 정의

저는 “구성원과 조직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성장하도록 돕는 인사담당자”라고, 정말 직무기술서처럼 썼어요. 반면 엔지니어인 분, 마케터인 분들은 저와 또 다른 방식으로 정의했죠. 한 분은 고객, 팀, 세상을 나누어 고객에게는 고민을 위한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팀에게는 동료가 일을 더 즐기도록 만드는 역할을, 세상에는 세상을 더 즐겁게 만드는 이로운 브랜드를 다양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정의했어요. 또 다른 분은 다른 사람들이 나로 인해 더 많은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역할을, 또 어떤 분은 정해진 시간 안에 주어진 일을 완수하는 데 자신의 역할을 정의했어요. 마지막 분은 자신의 업무 자체를 의미 만드는 일로, 팀에게는 중재자로서 통역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정의했어요. 정의한 문장부터 배경과 맥락까지 전부요.



이. 내가 쌓고 있는 지식, 기술, 태도

역시 저는 또 직무기술서처럼 나누어 썼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들을 집어내셨어요. 태도는 반사신경의 영역이니 애정이 중요하다는 정의. 관심은 늘 가져야 하는 요소이니 적극적인 자세가 중요하다는 정의. 필요한 태도는 당연하기 때문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되, 배우고 학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정의가 있었어요.



삼. 나의 기여

저는 첫 번째에서 한 답변과 연결해서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다른 분들은 또 멋진 대답을 하셨죠. 한 분은 조직 안에서는 나와 타인 모두의 소중한 시간 지킴이(워커홀릭),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1년을 계속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 또 다른 분은 취향을 만들어주는 마케터로 존재함으로써 세상을 더 즐겁게 만드는 사람. 마지막 분은 누군가의 불편을 해결해주는 개발자.



결론. 현대 사회에서 역할이란 단순히 “”이/가 아니라, “”이다.

이제 핵심입니다. 앞의 세 가지 질문을 거쳐 결론에 이르렀어요. A가 아니라 B다. 이 한 문장을 위해 대화를 나누고 필요한 요소들을 정의했죠. 저에게 A는 생계 유지, B는 연결고리였어요. 다른 분에게 A는 직무, B는 내 이름 그 자체였고, 또 어떤 분에게 A는 직무, B는 내가 정의하는 것이었어요. 전자는 업의 범주를 벗어나 일을 한다는 데 포인트가 있었고, 후자는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데 포인트가 있었답니다.


저를 위한 기록이라 모든 이야기를 다 적었지만, 핵심은 퀴즈였어요. 각 조별 대화가 끝난 뒤 앞에 있는 플라톤 조부터 차례대로 마지막 한 문장을 빈칸 상태로 공개한 뒤, 다른 사람들이 정답을 맞출 수 있도록 설명하고 힌트도 주는 차례가 이어졌죠. 퀴즈를 맞히기 위해 설명에 집중하고, 고민해볼 수 있는 방식 자체도 무척 즐거웠어요. 게다가 이미지의 빈칸을 보고 한 번 직접 생각해보기도 좋은 시간이었어요.



플라톤; 현대 사회에서 역할이란 단순히 A가 아니라 B다

소크라테스; 우리는 일의 의미를 스스로 알기 위해 A(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피쿠로스; 우리는 일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 A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최고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A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우리는 변화 속에서 A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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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가 다 끝난 뒤에는 각 조의 모더레이터가 한 명씩 수상자를 뽑았어요. 한 분씩 돌아가며 철학자의 이름으로 수상자를 선정하고, 선물을 전달했답니다. 플라톤상, 소크라테스상, 에피쿠로스상, 이렇게요. 선물을 받는 것도 물론 기쁜 일이지만 수상자로 선정되고, 수상 기준과 수상 이유를 듣는 일 자체가 무척 기분 좋고 즐거워지는 경험이었어요. 이벤트의 공간은 물론, 그 공간에 들어서는 첫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어 문을 나설 때 만족감이 큰 시간이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만난 질문들을 종종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눠보는 것도, 그리고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해보는 것도 앞으로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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