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화된 행복, 그것만이 정답일까?
누구도 자신의 행복을 기준으로 다른 이의 삶을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과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모두 태어난 시간, 날짜, 연도조차 다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정해진 흐름에서 벗어난 삶을 걱정한다. 대학에 가야 할 시기에 일을 하면 걱정하고, 일을 해야 할 시기에 다시 대학을 가겠다고 하면 또 걱정을 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만나고 경험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인정하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가끔은 흔들리는 순간이 온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몸은 척추동물이지만, 마음은 갑각류이기 때문이 아닐까?
예전에 한 방송에서 뇌과학자 장동선 교수님이 목포로 가는 비행기에서 한 청년을 만나했던 이야기를 들려 준 적이 있다.
그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처음에 생물학을 공부할 때, 갑각류가 가장 신비로웠다. 갑각류는 탈피를 해야 성장하는데, 탈피 직후에는 몸이 매우 약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성장하는 순간이 가장 약한 순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몸은 척추동물이지만, 마음은 갑각류라고 느꼈다.”
이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성장하는 과정에서 약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려할 때, 불안과 혼란을 마주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 불안해질 때, 걱정이 밀려올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기로 했다.
"나는 지금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가장 약해져 있는 순간에 내가 나를 보호해 주고 지켜주자"
정형화된 행복이란 사회가 일반적으로 규정한 ‘행복의 공식’이나 ‘이상적인 삶의 형태’를 뜻한다.
예를 들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적당한 시기에 결혼하고, 집을 사고, 자녀를 키우는 등의 삶의 흐름이 사회적으로 ‘행복한 삶’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대체로 다수의 사람들이 따르는 일반적인 행복의 틀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틀이 모든 사람에게 꼭 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는 전통적인 방식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전혀 다른 길에서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찾는다.
대학을 가지 않는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더 일찍 나와 다른 아이들보다 몇 년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빠르게 사회를 경험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중요한 것은 대학에 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길을 선택하든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결혼은 누군가에게는 선택일 수도 있고, 신념일 수도 있다. 혹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솔직한 선택을 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말을 시작했는데, 내 아이가 아직이라면? 그건 단순히 아이에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아이마다 발달 속도는 다르고, 중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아이가 자신만의 속도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노년이 외로운 것도 아니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다. 혈연이 아니더라도 깊이 연결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노년을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느냐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기준은 각자 다를 수 있다. 정형화된 행복은 단 하나의 모델일 뿐, 절대적인 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각자가 자신만의 행복을 정의하고 살아가면 된다. 그 과정에서 나와 만나는 시간이 필요할 테고, 스스로를 살펴보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탐구해 보는 시간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내 기준으로 타인의 삶의 속도를 규정할 수 없다. 존중하고 인정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