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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리의 가지 않은 길

by 앤디


늦은 여름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한 날, 과장님께서 점심을 함께 먹자고 하셨다. 여행에 대한 짧은 대화가 오고 가고 언제나 그렇듯이 회사 얘기가 시작되었다. 항상 늘 똑같은 이야기, 바뀌지 않을 상황에 대한 푸념 등등 그렇고 그런 이야기 끝에 과장님께서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내가 이거 땡땡이한테도 해준 말인데 너한테도 해주고 싶다며 꺼내신 말은 승진에 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땡땡이란 나보다 10개월 먼저 입사한 선배로 올해 있었던 승진 인사에서 나처럼 후배와 동기에게 밀린 남자 직원이었다.

과장님 말씀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것이었다.



회사 다니면서 둘 중에 하나만 할 것



이것저것 생각하기 싫으면 승진 포기하고 회사 다니든가, 승진하고 싶으면 한 번은 납작 엎드려서 인사권자에게 기라는 것.

올해도 벌써 10월이 끝나가고 내년 초면 인사시즌이 돌아오니 승진 대상자인 나에게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고픈 선배의 마음이었다. 위에서 말한 땡땡 선배나 나나 (기기는커녕) 뻣뻣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캐릭터들이라 안타까운 마음에 더 그러셨을 것이다.

불과 1년 전에 이 말을 들었다면 일말의 흔들림이라도 있었을 텐데, 웬일인지 걱정 담은 과장님의 조언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과장님은 승진 이후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거나 승진에 대한 마음을 아예 접는 한이 있더라도 회사 다니는 동안 한 번은 승진해야 하지 않겠냐고도 하셨다.
그러면서 반복적으로 내세운 명분이 후배들 보는 눈이었다. 후배들은 승진 못하면 이유 불문 무능력하거나 내 앞에서 걸리적거리는 선배쯤으로 밖에 생각 안 한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인사권자에게 기어줄 때는 '네가 생각하는 네 나름의 노력' 말고 '그분들이 원하는, 그분들이 좋아하는' 방식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셨다.
워낙 가감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특히 마지막 말씀은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세상 논리와 거리감 느껴지게 교과서적으로 열심히 하라고 하셨으면 진짜 코웃음 칠뻔했는데, 너 딴에 하는 노력 말고 그분들의 구미에 맞게 하는 노력이라는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기껏 침 튀기면서 열심히 말씀해주신 선배 과장님에게 내가 한 말은 건방지게도 이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승진하고 그러면 그다음은요?

그 이후의 연속성을 계획할 수 없는데, 일시적으로 뭔가 얻고 단절되게 살 거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과장님의 말씀이 잘못됐다고 토를 달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말대꾸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다.

나는 그냥, 정말이지 궁금했다.

과장이 되면 월급도 지금보다 오르고, 과장님 말씀처럼 후배들 보기 민망하지 않은, 걸리적거리지 않은 선배가 될지도 모르겠다. 나도 돈이 싫지 않고, 후배들한테 (존경받지는 못할망정) 무능력한 선배로 보이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한 편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기준들을 따라가며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했다가는 (내 인생 전체에서는) 한 순간에 새될 거만 같은 기분을 버릴 수 없었다.

내 질문에 과장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기지 못해 답답한 똥고집 후배는 밥까지 사주면서 걱정해주시는 선배 과장님을 끝끝내 허무하게 만들고 말았다.





아무래도 과장님이 제시하신 두 가지 길 중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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