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일정 하나하나를 다 예약할 수도 없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 않은 여행이 있다. 바로 이번 여행이 그랬다. 비행기 표는 여행 가기 1년 전에 끊고, 호텔도 비교적 빨리 예약했지만 세부 일정 짜기는 그 어떤 때보다 게으른 여행이었다.
무계획의 여행이라도 맥주를 좋아하는 내가 더블린까지 와서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에 가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 당연히 더블린에서 보내는 하루의 반나절은 여기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기네스 스토어 하우스 입구에 다다르자, 입장권 끊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긴 줄이 보였다.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을 살짝 후회했지만 뭐 이것도 경험이다 하면서 줄을 서는데 비가 툭툭 내리기 시작했다. 더블린에 도착한 이후 줄곧 흐리긴 했어도 진짜 비가 온 적은 없었건만, 하필 밖에서 줄을 서야 하는 그날 비가 온 것이었다. 점점 빗줄기가 거세져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우산처럼 뒤집어썼다. 여기저기 비에 젖었지만, 어쩜 이렇게 술 마시기 좋으라고 분위기까지 받쳐줄까 하는 그런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예상보다는 빨리 실내에 진입하여 드디어 티켓팅 하는 순간이 왔다. 오디오 가이드 안내를 위해 직원이 우리의 국적을 체크한다. 아쉽게도 한국어는 없어 바로 티켓 구입 단계로 넘어갔다. 돈을 내면서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는 준비할 계획이 없냐고 물어봤더니, 안타깝지만 아직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부족한 영어 실력의 슬픔이 시작되었다. 당연히 모든 설명은 다 영어, 그리고 또 영어였다. 영어 독해 문제집을 꽤 풀고 대학을 들어간 거 같은데 설명을 읽고도 찝찝하고 자신 없는 독해가 계속되었다. 그래, 맥주에 대한 전문용어가 많이 나온 탓일 거야 이런 식으로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주야장천 등장하는 barley(보리)도 몰라서 찾는 것이 내 현실이었다. 기네스 맥주에 대한 텍스트를 자세히 읽고 싶었지만, 영어실력 탓에 쿨하게 접고 놀이동산에서 뛰어노는 아이마냥 어른의 놀이동산 같은 이 분위기를 그냥 즐기기로 했다.
이 와중에도 가까스로 해석이 되는 부분 부분이 있었는데, 이걸 보면서 나란 인간은 어떤 온도에서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폭파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지금 발 딛고 있는 현실의 온도는 아무래도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자기만의 적정 온도를 찾은 기네스 맥주가 부러웠다.
기네스 스토어하우스 입장권에는 맥주 한잔의 가격이 포함되어 있어 건물 맨 위층인 루프탑으로 가서 맥주를 마셨다. 사실 평소 내가 자주 마시는 맥주에 기네스는 없었는데, 기네스 맥주가 거품과 함께 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앞으로 나는 기네스 너와 함께 간다고 다짐했다.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본 고장에서 오는 그 어떤 힘을 느꼈다.
맥주 맛에 감격해 호들갑을 떨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비 오는 더블린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나는 보통 이런 순간, 일상을 떠나 여행 왔음을 실감한다. 평일 이 시간, 평소 때라면 맥주 대신 커피를 손에 쥐고 한창 무엇을 하고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말이다. 돌아가면 딱 그 삶이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은 히죽히죽 웃음이 새 나왔다.
맥주 한잔을 홀짝홀짝 다 마시니 나 혼자 스토어 하우스 맥주 다 마신 사람처럼 얼굴이 시뻘게졌다. 기념품샵으로 내려와 신나게 쇼핑을 하고 기분 좋게 밖으로 나왔더니, 외투를 뒤집어써도 감당 안될 비가 후드득 쏟아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계획에 없던 기네스 우산을 구입했다.
기네스 맥주가 선물해준 약간의 술기운과 더블린의 비 오는 날은 가히 환상의 조합이었다. 예약을 했더라면 그렇게 맞추라고 해도 맞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아니었다면 내가 언제 또 기네스 우산을 사서 써보겠냐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