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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Feb 15. 2020

치앙마이 6일 차, 예술적인 목요일

치앙마이에서 일주일 머물기


 어떤 여행지에 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하다 보면 그 여행지에 대한 나만의 이미지가 생긴다. 그리고 그것이 여행지에서 실제로 구현될까, 아예 달라져 버릴까 하는 궁금증은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증폭시킨다.

 여행을 떠나기 전, 치앙마이에 대해서도 나만의 이미지라는 것이 있었다. 혼자 상상만 했던 것이 놀랍도록 잘 맞아떨어졌던 날은 치앙마이 6일 차, 반캉왓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2차선 남짓의 도로, 듬성듬성 있는 카페,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완벽한 하늘, 감도는 공기마저 평화로운 분위기...

모든 것이 내가 생각했던 치앙마이 그 자체였다.  

 치앙마이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반캉왓 예술인 마을은 내가 머문 호텔에서 차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도착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여유롭고 한가롭게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 첫 느낌은 내가 사는 현실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이었다. 느긋함 속에 부지런함이 있고, 다양한데 잘 어우러져 있으며, 조용하고 차분한데 자기만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나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위기의 마을이라 동화 속 세계 같기도 하고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였다. 예술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유독 더 감각적일 수도 있었겠지만,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모여 사는 초기 마을의 형태가 어쩌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인간은 자유분방하게 있을 때 각자가 갖고 있는 자기만의 예술성을 뿜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사는 세계는 뭐가 뭔지도 모를 무언가를 쫓느라 치열하고 바쁘다.




 

 한 걸음마다 내 눈에 담기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몹시 소중해 빨리 걸을 수 없었다.
이 순간의 기억을 놓칠세라 계속 사진을 찍으면서도 속으로는 여긴 정말 내 스타일이야, 진짜로 이런 마을에서 살고 싶다를 중얼중얼거렸다.



 마을의 중간쯤 다다랐을 때, 사촌 동생이 초상화를 그려주는 곳이 있다며 그곳에 가보고 싶다 했다. 사촌동생이 나에게도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짧은 시간이어도) 화가 앞에서 모델이 된다는 것이 영 어색해 사양했다. 사촌 동생이 본인의 초상화를 득템 하는 사이 나는 혼자서 마을을 더 둘러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들어갈 곳 없는 마을의 가장 안쪽에서 도저히 지나칠 수도 뿌리칠 수도 없는 상점, 아니 작품을 만났다.




 입구부터 끌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 그곳은 도자기 스튜디오였다. 컵과 같은 일상생활용품이 많았는데, 유독 내가 어쩔 줄 몰라했던 것은 책상 위에 놓으면 좋을 법한 고래였다. 단순하게는 천명관 작가의 소설 고래의 광팬이기도 하고, 고래를 생각하면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부터 떠올라 (진열된 도자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고래를 마냥 부럽게 쳐다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래에 매료되었는데 작가가 만든 다른 작품을 찬찬히 보니 역시 눈을 뗄 수 없었다.




 캐리어의 한계 때문에 살 것을 추리고 추려야 했는데, 아마 한국이었다면 탕진했을지도 모르겠다. 직원이 내가 산 컵과 고래 등을 단단히 싸주는 동안, 작업 중인 작가에게 말을 걸었다. 이 모든 걸 본인 혼자 디자인하고 만들었다 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 하니 작년에 일 때문에 부산에 왔었단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가 나에게 뭘 좀 마시겠냐고 물어왔다. (원래 유료인 것 같았는데) 나에게 free라고 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 하자, 직원이 그가 만든 작품을 사용해  정성스레 커피를 내려줬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었다. 커피가 담겨있는 그의 작품 탓일까, 커피맛도 상당히 좋게 느껴졌다.  

 다가오는 5월, 작가는 DDP에서 열리는 페어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고 했다. 반캉왓의 다른 아티스트들도 함께 말이다. 가까운 미래에 한국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5월에 DDP에서 꼭 보자는 인사를 나누고 스튜디오를 나왔다.  



그 사이 사촌동생의 초상화도 완성되어 있었다. 사촌 동생은 초상화를, 나는 고래를 소중히 들고 반캉왓 예술인 마을 작별인사를 했다.




 나오는 길에 시크하기 짝이 없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평소 고양이를 만나면 무서워서 도망치는데, 웬일인지 이 마을에서는 고양이조차 아티스틱하게 느껴졌다.




 반캉왓 예술인 마을을 떠나 이번에는 호텔 근처의 리스트레토라는 카페에 갔다. 우유 섞인 커피는 잘 마시지 않지만 라테 아트 월드 챔피언이 운영하는 카페라기에 라테를 주문했다. 한 컵이 아닌 한 사발 수준의 유니콘 라테가 내 앞에 놓였다.




 

 마시려고 시킨 건데 내가 입을 대는 순간 유니콘의 모양이 흐트러질까 걱정되었다.  (생각보다 견고한 건지) 세 모금 정도를 마셨는데도 유니콘이 사라지지 않았다. 커피는 곧 예술이라는 철학을 지닌 곳이라는데, 마시는 즐거움뿐 아니라 보는 즐거움도 주는 곳이었다.





 아트 혹은 아티스틱 적인 것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일상을 살다가 특별한 목요일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통의 목요일을 떠올리게 되었다.

 규정에 맞냐 안 맞냐를 따진 서류더미, 책임 소재에 대한 날 선 태도, 형식과 절차에 가로막힌 비효율적이고 반복적인 행태가 난립하는 곳에서 창의성과 강한 개성은 덕목이 아니라 정 맞기 딱 좋은 악재다. 그런 한복판에서 평소 나의 목요일이란, 그 온갖 것에 쥐어 터져 심신의 피로도가 극에 달하는 기절 각인 요일이다.




 재능도 용기도 없는 아트 러버인 나는 이런 목요일을 수십 번 거쳐 번 돈으로 예술이라는 영역을 조금씩 향유한다.

 치앙마이 6일 차,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닌 보고 듣고 느끼는 보통인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했다.

 예술이 가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예술가의 고집이 거세되거나 꺾이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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