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 Mar 11. 2020

이것은 일종의 팬레터입니다



 저번 주 토요일. 실로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부터 몸이 몹시 아팠었는데, 내가 점점 괜찮아졌을 때쯤 세상 전체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번 주말 나는 나 자신을 잊지 아니 잃지 않기 위해 외출을 감행했다.


 마스크를 단디 쓰고 차 시동을 켰는데 배터리 방전으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거의 두 달만에 하는 운전이라 이럴걸 예상하고 서둘러 나오길 잘했다. 보험사 긴급출동을 부르고 시동이 켜지는 걸 확인한 뒤 서울로 차를 몰았다.  

 나의 목적지는 합정과 상수 사이의 한 카페였다. 보통 합정이나 신촌으로 차를 끌고 갈 때는 양화대교를 타지만 이번에는 서강대교를 탔다. 늘 지하철로 등교해서 학창 시절에는 몰랐던 길이지만 어쨌든 이 길은 모교로 가는 길이다. 점점 잃어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집착인 걸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에 향해 있다.  

 친구 아파트에 차를 대고 카페를 찾기 위해 지도를 켰다. 내 목적지는 그냥 카페가 아닌 내가 애정 하는 작가의 개인 전시가 열리는 곳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못 감추고 서두르는 바람에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일찍 도착했다. 같이  전시를 보기로 한 선배를 기다리며 전시장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작가님의 그림을 처음 접하게 된 건 작년 이맘때였다. (지금도 완치된 것은 아니지만) 그때 나는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나조차도 뭔지 모를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정체 모를 무언가에 의해 이리저리 쥐어 터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누군가와의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해 무척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주말 나는 마루 소파에 드러누워 무기력한 자세와 무표정한 얼굴로 무의미한 검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작가님의 '적성'이란 그림을 보게 되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추측컨대 녹색창에 적성이란 검색어를 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눈물샘 작동 버튼이 눌려진 사람처럼 소파 위에 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담담하고 정제된 표현을 찾지 못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나의 속마음을 그림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꽁꽁 숨겨둔 마음이었는데 실은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던 것인지, 이상하게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작가님의 블로그에 게시된 다른 그림들을 감상했다. 그림을 보면 볼수록 자꾸만 마음의 빗장들이 하나둘 풀리는 듯한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그날부터 작가님의 그림과 인터뷰를 찾아보고, 작가님이 쓴 글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이것은 실화일까 싶을 정도로 그의 글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너무 좋았다.

 삶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고민, 그리고 그것을 예술가로서 표현하는  방식까지 그냥 모든 것이 좋았다 하면 이건 정말 부정할 수 없는 팬심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나는 그림을 보고 작가님의 팬이 될 문을 열고, 글을 읽고 나서 (영원한) 팬이 되기로 문을 닫았다. 가수 김동률,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에 이어 아티스트에 대한 내 인생 세 번째 덕질이 시작된 것이다.




 팬심의 끝은 자연스럽게 작가님의 그림을 직접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이어졌고, 작년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나는 처음으로 작가님의 전시에 혼자 가게 되었다. 그리고 내 생애 처음으로 작품으로서의 그림을 덜컥 내 공간에 들였다. 마음 같아서는 전시된 그림들 전체를 몽땅 옮겨오고 싶었지만 절제하고 절제하여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그림들을 엄선하여 데려왔다. 물론 그 그림들은 지금 내 방 안에 아주 소중히 놓여있다.




 어떤 사람, 어떤 동물, 어떤 책, 어떤 음악, 어떤 그림, 어떤 장면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들로 나를 무장해제시키곤 한다. 그리고 그런 기억들은 (사는 동안) 내가 잃고 싶지 않은 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그 힘이 시들 시들 해질 때쯤 그것을 충전하기 위한 시간들은 내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저번 주말 외출을 했다.

 내 마음 전부를 들켜도 두려울 것 없는 친한 선배와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의 전시를 보고 나니 일상의 배터리가 완충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키고 싶은 내 모습으로 온 하루를 보내고,

나는 다시 한번 한 예술가와 그 예술가의 그림과 그 예술가의 글에 대해 깊은 감사함을 가졌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위한 나들이, 인천 아트 플랫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