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경제신문을 읽다가 영국 화가의 전시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전시가 끝나기 전에 반드시 가려고 기사를 가위로 오려 부적처럼 간직했다.
신문에 적힌 그에 관한 이야기에는 내가 열광하는 키워드가 가득했다.
일단 그의 이름 빌리 '차일디시' , 시인 '이상'을 그렸던 이력, 개인전 제목이 '늑대, 일몰 그리고 자신',
젊은 시절 예술의 거만함을 조롱하는 저항운동단체에서 활동, 화가를 넘어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펑크 뮤지션,
'나는 어린아이가 그리는 것과 같이 그림을 그린다'는 그의 말, 그의 회화적 스타일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에르바르트 뭉크의 흔적이 발견되는 것 등등.
이쯤 되니 내 입장에서는 안 가고는 못 배기는 상황이었다.
곧 전시가 끝날 것 같아서 연차를 내고, 운전을 해서 서울에 갔다. 평일이라 길이 안 막힐 줄 알았던 건 오산이었다. 10점도 채 안 되는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나는 길 위에서만 4시간 정도를 썼다. 그래도 행복했다. 언제나 그렇듯, 비효율적일수록 전략적 사고라는 것이 전무할수록 내가 느끼는 행복의 크기가 크다. 희한하다.
늑대는 내가 좋아하는 동물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애정 하는 동물이다. 늑대를 좋아하게 된 건 12년째 함께 살고 있는 나의 강아지가 늑대를 닮았기 때문이다. 실상은 순하디 순한 암컷 강아지인데, 우리 강아지를 본 사람들 대부분은 고놈 참 잘 생겼다 혹은 늑대같이 생겨서 무섭다는 말을 하곤 한다. 그 말을 듣고 빤히 강아지 얼굴을 쳐다본 적이 있었는데 내가 봐도 늑대와 외모가 비슷했다. 그렇게 좋아하게 된 늑대는 그림에서 만나게 될 때도 멋있었다. 늑대 자체가 영감을 주는 동물인 건지, 화가가 그린 그림 속 늑대는 유독 내게도 영감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빌리 차일디시라는 화가는 어떻게 늑대를 표현했을지 궁금했다.
전시장 1층에 바로 늑대 그림 2점이 있었다.
첫 번째 늑대 그림은 나로 하여금 늑대와 내가 일대일로 대치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늑대 특유의 강렬한 에너지가 전달되었다. (그림인데도) 그 기운에 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그림 구석구석을 살피면서도 자세를 바로 하고 눈빛 카리스마(?)를 유지했다.
두 번째 늑대 그림은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서 오래 두고 본 작품이다. 사냥감을 쫓기라도 하듯 산 비탈길을 달리는 늑대가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을 쫓는 건지, 그저 산속을 방황하는 건지는 늑대가 아닌 이상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뭐가 됐든 둘 다 내가 자주 하는 '움직임'이라 마음이 갔다.
그가 표현한 정물이나 풍경을 보니 왜 그의 회화적 스타일이 자주 빈센트 반 고흐와 비교되는지 알 것 같았다. 비교는 어디까지나 비교일 뿐이고, 나는 그가 그림에서 구현해내는 보라색에 시선이 집중됐다.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봐왔던 수많은 그림 중에 보라색으로 자연 풍경을 표현한 화가가 있었던가 떠올려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그림에서 그가 보라색을 쓰는 방법이 인상적이고 새로웠다.
글을 쓰면서 그의 음악을 찾아 듣고 있다.
영국 어느 뒷골목, 왠지 이름에 wolf가 들어갈 것같은 pub에 이미 앉아있는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