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 때 나는 우리 반 미술부장이었다. 미술부장이라고 하니까 꽤 거창해 보이는데 별 건 없었다. 미술수업이 있는 전후로 미술실 문단속을 하고, 미술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반 친구들에게 전달하고 그 밖의 미술수업과 관련된 온갖 잡다한 일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미술부장의 임무를 수행하면 얻는 대가는 파격적이었다. 무려 미술 실기 점수의 만점이었다. 미술을 사랑하지만 재능이 없었던 내게는 지나칠 수 없는 조건이었고 잽싸게 손을 들고 지원을 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내 내신 성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는 '야망 소녀'였다. 나를 포함해 세 명의 지원자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제비뽑기를 했다. 그 결과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종이를 뽑은 내가 당첨되었다.
미술부장에 내 건 조건만큼, 미술 선생님의 필기시험 출제경향은 다소 파격적인 측면이 있었다.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주관식 맨 마지막 문제였고 배점이 10점이나 되는 어마 무시한 문제였다. 문제가 원하는 정답은 화가의 호와 이름을 정확히 적어내는 것이었는데 이름은 그렇다 치고 호까지 쓰라니 완전히 허를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나는 이름만 적어서 부분점수를 받았던 것 같다. 뒤통수를 맞아 당혹스러웠지만, 그래도 내게는 미술부장 어드밴티지 만점의 실기점수가 있었다. 그 화가의 이름은 운보 김기창이었는데, 그 이후 나는 그림 한 번 감상한 적 없는 그 화가의 호와 이름을 지금까지 못 잊게 되었다.
얼마 전 수업을 듣다가 큐레이터이신 선생님이 최근 열리고 있는 전시회 중 하나를 강력 추천하셔서 한 한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박래현 화가라는 분이었다. 화가 이름과 전시 장소를 받아 적고 있는데 선생님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ㅡ 운보 김기창 화가의 아내분이에요.
미술에 엄청난 조예가 깊은 건 아니지만 순간 몇몇 여인들의 이름이 머리를 스쳐갔다. 너무도 유명한 연인 혹은 남편에 가려져, 본인 자체의 예술성에 대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여자 예술가들의 이름이었다. 전시회를 갔다 온 사람마다 그림이 정말 좋다고 했다며 선생님께서 시간 되시는 분들은 꼭 가보시라고 재차 강조하셨다.
그렇게 나는 지난 주말 덕수궁미술관에 다녀왔다. 박래현 화가의 모든 그림을 보고 미술관을 나오면서 내가 했던 생각은 이 분의 전시를 추천해주셔서 이 화가를 알게 해 주신 큐레이터 선생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감상의 폭이 좁고 식견이 짧아 지금까지 동양보다는 서양, 여성보다는 남성 화가의 그림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그림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눈이 새롭게 뜨이고 감상의 영역이 갑자기 확 넓어진 기분이 들었다.
작품을 감상할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작품 연도가 진짜 이게 맞나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는데, 그만큼 그림이 현대적이고 세련되었다. 그러면서도 화가가 살았던 시대적 정서 또한 동시에 느낄 수 있어 흥미로웠다. 훌륭한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면 늘 느끼는 깨달음이지만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시대를 관통하고, 인간 본연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 전시가 또 특별했던 것은 아무래도 화가가 여성이라는 것과,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도 있다. 오디오 해설에서도 그렇고, 전시 중간중간 등장하는 글귀에서도 그렇고, 그녀의 그림에서도 그렇고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끊임없이 양립하는 아내, 엄마, 여성으로서의 고뇌가 잘 전달되기 때문이다. 비록 나는 그 누구의 아내 엄마는 아니지만 전시를 보는 내내 나의 엄마를 생각했고, 내 올케를 떠올렸고, 내 친한 친구와 친한 동료가 지금 내 옆에 없음이 아쉬웠다. 웬일인지 미소가 지어졌다가도 먹먹해지기도 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실, 전시 이후에 또 수업이 있어서 천천히 보고 오질 못했는데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엄마를 모시고, (두 딸의 엄마가 되어버려) 지금은 그림을 못 그리는 미술 전공자인 올케와 함께 다시 한번 미술관에 갈 계획을 하고 있다.
덕수궁 입장료 천 원이면 이토록 가슴 떨리는 전시를 공짜로 볼 수 있는데, 미술관을 들어가며 나오는 길의 풍경은 또 이 정도다.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딸,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누군가에게 나 또한 이 전시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