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입원한 지 4일째 되던 날, 생애 첫 그림을 구입하며 알게 된 큐레이터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큐레이터님이 일하고 계신 갤러리에서 전시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전시회 초대권을 보내주고 싶다며 주소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전시 마지막 날 별다른 말도 없이 그림 5점을 구입했던 내가 큐레이터님에게 퍽 인상적이었던 건지, 1년 하고도 7개월이 지났음에도 나를 기억해 문자를 보내주신 그 자체가 너무 고마웠다. 마침 또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뜻밖의 문자를 받아 감수성이 남달랐을지도 모르겠다.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 후 퇴원하고 나서도 크고 작은 소용돌이가 나를 덮치는 바람에 (진심으로 감사했던)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2주 정도 지났을까. 큐레이터님이 말했던 그 초대장이 집에 도착했다. 초대장 봉투에 ㅇㅇㅇ 컬렉터 님께 라고 적혀 있었다. 스스로에게 낯 뜨겁고 부끄러운 명칭이었지만, 왠지 모를 우쭐한 기분도 함께 들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입장권 카드에는 아예 VIP라고 적혀 있었다. 막상 가보면 그 VIP들이 내 생각보다 늘 많다는 게 함정이지만, 입장권부터 Very Important 한 Person이라는데 나쁠 리 없었다.
사실 나는 전시회를 가기로 한 날 아침까지도 갈 수 있을지 없을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때 내게는 집을 비울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데, 마침 다른 가족들이 다 집에 있었고 비가 장마철처럼 쏟아지는 등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져 주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건의 기승전결을 알고 있어 근황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데다가, 마침 하는 일이 전시회로부터 영감을 받을 수 있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언니와 함께 보기로 했다. 전시장소는 코엑스였고, 차가 밀릴까 봐 서두른 나는 한 시간 정도 빠르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코엑스에 온지도 거의 10년이 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금세 드라마에서 봤던 대형 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촌스러울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도서관 구석구석을 살피다 짧은 시간 동안 읽기 좋은시집 섹션으로 향했다. 제목만으로 끌리는 시집 3권을 골라서 자리를 잡았다.
한참 한국 시인의 시에 빠져 읽고 있는데, 그 시에서 인용된 문구가 내가 고른 외국 시인의 시집 제목이라서 소름이 끼쳤다. 나는 시를 읽고 있을 뿐인데 운명의 장난처럼 나를 저격하는 문장들만 연달아 나와서 또 소름이 끼쳤다.
그렇게 연거푸 소름이 돋고 있을 때 언니가 도착을 했고, 함께 전시 장소로 갔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행사였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수많은 갤러리에서 각자 소장하고 있는 주요 작품을 들고 나와서한 곳에 전시하는 아트 페어였다. 공간도 크고 작품도 많아 처음에는 정신이 없었는데 찬찬히 감상하다 보니 흥미로운 작품들이 꽤 많이 있었다.아프리카 화가의 그림을 전시했던 갤러리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고, K-POP Sculpture에서 가장 자세하게 감상했다.
처음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는 작품을 볼 동선을 짜느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전시장을 나올 때 보니 유명 화가의 비싼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갤러리일수록 위치가 좋았다. 동산이든 부동산이든 역시 '위치'구나... 자본 심는 데서 더 큰 자본이 나오는구나... 를 또 한 번 실감했다.
저번처럼 그림을 사지는 못했지만, 보물찾기 하듯 여러 작품들을 발견하여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우리나라에 재능이 뛰어난 작가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열정의 결과물이 한데 모여있음이 감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대장 봉투에 써진 대로 진짜 컬렉터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