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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May 14. 2020

콩나물국밥을 만나고 어른이 되었다


내가 국밥을 사랑하게 된 역사는 길지 않다.

 국밥과 사랑에 빠지기 전에도 국밥을 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국밥에 대한 예를 갖추지 않은 '국 따로 밥 따로'식의 부적절한 식사법으로 국밥을 먹곤 했었다.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 이란 시를 읽고 국밥이란 음식이 참 낭만적인 음식이구나란 생각을 했을 무렵, 순대국밥을 먹으며 국밥의 매력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순대국밥 집은 내가 사는 지역의 토박이들에게는 꽤 유명한 맛집으로, 밥이 아예 순댓국에 말아져 나오는 곳이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부모님을 따라갔던 나는 (국 따로 밥 따로 먹어온) 나의 오랜 규칙을 깰 수밖에 없었다.
 배는 고픈데 물러설 곳은 없고, 별 수 없이 순대국밥을 한 술 떠 입에 넣었다. 밥알이 퍼질 대로 퍼져 맛이 없을 거란 예상과 달리, 부드럽게 적당히 불려진 뜨끈한 순대국밥이 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첫 술 이후로 쉴 새 없는 수저질이 이어졌고, 그렇게 바쁜 사이사이 후루룩 국물을 삼키기도 하고 잘 익은 깍두기를 베어 물기도 했다. 순대국밥의 바닥이 보이고, 숟가락이 그릇 바닥을 스윽스윽 긁는 소리가 날 때쯤 밥 먹는 내내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비로소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날 이후부터 국밥은 국에 밥을 말아먹어야 참 매력을 발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엄마의 고향이자 나의 외가인 전주는 맛없는 음식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로 맛난 음식이 넘쳐나는데  내가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도 바로 콩나물국밥이다. 부모님과 함께 전주에 갈 때면 부러 남부시장에 들러, 할머니 사장님이 말아주시는 콩나물국밥을 꼭 먹고 온다.

 콩나물 국밥 위에 송송 썰린 오징어, 국물 몇 스푼과 김가루가 흩날렸을 때 꼬수함이 절정에 이르는 수란, 요구르트인지 술인지 (먹을 때마다) 헷갈리는 모주마저 곁들여지면 비로소 내가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어른들이 왜, 누가 봐도 뜨끈한 음식을 먹고 나서 시원하다 하는 건지에 대한 미스터리를 콩나물국밥을 들이켠 순간 풀 수 있었다.

 

콩나물국밥을 통해 어른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어서일까, 순간순간 찾아오는 어른의 설움 역시 콩나물국밥으로 위로받을 때가 많다. 특히 회사에 출근해 먹고사는 것의 고됨과 치사스러움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날에는 언제나 점심으로 콩나물국밥을 처방한다.
비주얼만으로 이미 시원한 콩나물국에 밥을 꾹꾹 말아 허겁지겁 먹다 보면, 없던 설움이 되진 않아도 덜한 설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일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를 들었다.

 더 더워지기 전에, 내일 점심은 콩나물국밥으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뜨뜻하게 덥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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