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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May 18. 2020

4살짜리 조카가 고모에게 던진 숙제


 동생이 일이 있어서 주말에 4살인 첫째 조카를 데리고 집에 왔다. 그렇다면 조카와의 놀이 담당은 할머니 할아버지보다는 젊은(?) 고모인 내 몫이 될 가능성이 크기에 하던 일을 접고 조카와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좀 놀았는데, 어린이집을 못 가고 있는 조카나 사실상 회사 집만 오고 가는 나나 답답했던 건 매한가지라 마스크를 단디 쓰고 평소 자주 가는 공원으로 차를 몰았다.

 다들 바깥공기가 그리웠던 건지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연인과 함께 마스크를 쓰고 나와 있었다. 살짝 덥긴 했지만 날도 좋고 선선한 바람도 좋았다. 역시 신이 난 조카는 한참을 뛰어다녔고, 그 텐션에 호응하려고 낼모레 마흔인 고모는 헉헉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공원은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 걷기도 좋은데 숨도 고를 겸 손을 잡고 천천히 걷다가 우와 바다네, 하고 내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조카가 "고모, 바다에는 인어공주가 살아."라고 말해주었다. 바다에 살고 있는 생물이라고는 초장에 흠뻑 찍어 먹을 활어회 생각뿐인 나이지만 어, 그러네! 맞아, 바다에는 인어공주가 살고 있지.라고 대답해주었다.

 갑자기 인어공주의 슬픈 결말이 생각이나 조카에게 인어공주가 나중에 어떻게 되지? 하고 물었는데 조카는 답이 없었다. 조카는 인어공주가 바다에 살고 있는 것만 기억할 뿐, 그 공주가 물거품이 되는 비극은 아직 이해하지 못는 모양이었다.

 인어공주가 인천 앞바다에 살고 있다는 귀한 동심을 얻고 슬슬 돌아가려는데, 조카가 이번에는 연을 날리고 싶다 하였다. 나는 미쳐 보지도 못했는데 나보다 한창 작은 녀석이 하늘에 날고 있는 연은 또 어찌 본 건지 신기했다. 실제로 초등학생 정도 돼 보이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조카가 너무 날리고 싶어 해서 공원 근처 매점에 가서 공작새 연을 사주었다. 바람이 좋아서 연날리기는 상당히 성공적이었고 조카도 무척 재밌어했다. 조카를 도와주려고 처음에 내가 먼저 얼레를 돌렸는데, 연을 날린 지 약 30년 정도 되어서인지 사실 조카보다 내가 더 설레었고 내가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히 조카에게 뺏기었고 나는 조카 옆에 쭈그려 앉아 연이 날아가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가느다란 실로 묶여있긴 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훨훨 나는 연이 한없이 부러웠다. 생각보다 높이 날고 너무 잘 날아서 깜짝 놀랐다.



 연날리기까지 마치고 이번에는 조카가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사 먹으려고 다시 차로 갔다. 길을 한 번 건너야 했는데 조카가 "고모, 나 손들고 길 건너있는 거야." 했다. 나는 양쪽 차선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정말로 조카가 조막만 한 손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귀여웠다.


 운전을 하다 보면 아이들이 손을 들고 길을 건너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미소를 짓곤 한다. 출근하던 어느 날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다가, 그렇다면 아이는 언제부터 손을 내리고 걷기 시작할까 궁금해진 적이 있었다.

 키가 커서 운전자에게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손을 내리고 길을 건너도 별 일 안 생긴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그것도 아니면) 이제 손을 들고 건너는 건 아기들이나 하는 유치한 행동으로 여겨졌을 때?

  나도 조카 나이 때는 손을 안 들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항상 손을 들고 길을 건넜던 것 같은데 그 맹목적인 아이의 믿음이라는 것 언제 사라진 건지 모르겠다. 바다에는  인어공주 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때와 비슷한 걸까.







 조카가 던진 물음표가 머리에 둥둥 떠다닌 채로 다시 차에 탔다. 조카는 항상 내 차에 타면 무조건 겨울 왕국 노래를 틀라고 주문하는데 어제도 어김없이 명령하셔서 겨울 왕국 노래를 틀어드렸다. 숨겨진 세상 노래가 끝나고 나와 같은 질문형 노래가 들려왔다. 조카 때문에 이전에도 몇 번 들었던 것 같은데 늘 흘려들었던 노래 가사가 새삼 귀에 와 박히었다. (나는 아직 겨울왕국 1,2를 본 적이 없는데 노래를 듣던 조카가 올라프가 부르는 노래라고 알려 주었다)


어른이 돼보면 그땐 알까
모든 게 다 이해가 될까
좀 더 철이 들고서
나를 돌아본다면
다 별일 아닌 일이 돼버릴까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과 날 맞추는 것
성숙해지면
내가 단단해지면
으스스한 게 쳐다봐도 괜찮을 거야

하루 종일 꿈을 꿔
어른스러운 내 모습
나이가 들면 모든 게 다 이해가 될까

ㅡ겨울왕국 2 ost, 어른이 된다는 건



 나도 모르게 올라프의 물음에 음... 아니야. 글쎄... 모르겠네 이런 대답 하고 있었다. 물론 조카의 동심을 해칠 수 없어 철저히 속으로만 말이다.

 운전을 할 수 있고, 조카에게 연과 딸기 케이크를 사줄 수는 있지만 결정적으로 어른이 된 다는 게 뭔지 모르는 고모와 4살 조카의 데이트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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