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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May 14. 2020

삼십 대 후반, 솎아내기의 계절


 이십 대 후반, 취업전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

한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지금이나 10년 전이나 청년실업은 항상 문제였고, 졸업만 하고 붕 떠버린 나 역시 마냥 놀 수만은 없어 청년인턴이라는 이름의 임시직으로 6개월 정도 그 기관에 출퇴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가 매년 하는 행사로 추정되는 봉사활동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한 나절 동안 배를 재배하는 과수원에 가서 일손을 돕는 것이었는데 그때 내게 주어진 일은 배를 솎아내는 작업이었다. '솎아내기'란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밀파되거나 밀식된 식물체의 생육 환경을  양호하게 하기 위하여 사이사이의 식물체를 뽑아내어 식물체의 간격을 넓히는 일"이라고 나온다.

 실제 과수원 주인 분이 더 잘 자랄 배를 위해서 나머지 것들은 솎아내는 거라는 설명을 해주셨고, 그때 나는 농가에서 쓰는 '솎아내기'라는 말을 처음 배우게 되었다. 목장갑을 끼고 가위를 쥔 다음 사다리를 올라타긴 했는데 (아직은 배라고 할 수 없는) 푸르뎅뎅한 아기 배들 중 무엇을 잘라내야 하는 것인지 그때의 나는 무척 난감했었다.
 농사 무식자로서 뭘 모르기도 했지만 내 눈에는 그저 다 잘 자랄 배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손을 도우러 간 것이었기에 최대한 설명에 귀 기울여 가며 조심조심 배를 솎아내긴 했지만 행여 미래의 멀쩡한 배를 잘라내는 건 아닐까 계속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인생에서의 솎아내기가 시급하고 절실한 요즘, 망설임 가득했던 이십 대 부쩍 자주 떠올린다.


 그때는 내 삶의 모든 것에 '가능성'과 '잠재력'부터 대입했던 시기고, 과수원의 아기 배들 뿐 아니라 내가 가진 전부가 무럭무럭 잘 자랄 것이라는 환상과 믿음을 갖고 있던 시절이다. (만약 지금 배 솎아내기 작업을 하게 된다면, 누구보다 빠르고 단호하게 안 될 성싶은 배부터 싹둑 잘라 낼 것 같다.)

 삼십 대 후반이 된 지금 내 나이를 가만히 응시해 본다.

최종 결판까지는 아니어도, 중간점검 정도까지는 가능 기분이 든다. 로또 당첨이나 천지개벽 등의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대충 내 삶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겠구나 하는 짐작도 점점 뚜렷해진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두렵고 불안해진다. 삼십 대 후반의  내 현실에서 풍기는 그 기미란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주어진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데 정답이 탁 떠오르지 않을 때는, 내게 놓인 선택지들 중 나와 맞지 않는 것부터 하나씩 지워 나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한다.

 결국 삶에 대한 솎아내기다. 배 솎아내기가 생각난 기념으로, 오늘 내게 놓인 선택지 중 한 가지를 싹둑 잘라보았다.


바야흐로 솎아내기의 속도감과 단호함이 필요한 시절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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