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3년 차에 접어들 때쯤 해외 유관기관과의 회의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오랜만에 영어로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지만 막상 가보니 그 나라 언어를 구사하는 통역사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이미 준비해 간 발표자료를 읽을 때 외에 고급(?) 영어는 필요치 않았다. 그런 행사는 연중 한 두 번 벌어질까 말까 한 일이고 평소 회사 업무에 영어가 쓰일 일은 사실상 없지만, 나는 그 참석을 계기로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받은 교육이 문법과 독해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었다 해도, 해외 연수를 단 한 번도 다녀온 적 없었다 해도, 준비된 대본 외에 내가 구사하는 영어라는 것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 충격을 동력 삼아 주말에 즐겨가는 카페에 앉아 영어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 어르신 몇 분이 들어오시더니 내 옆 테이블에 앉으셨다. 그중 한 분이 내 영어책을 보셨는지 다 들릴만한 목소리로 "그래, 요즘 취업이 참 힘들어, 문제야." 하시며 자리에 앉으셨다.
그때 나는 속으로 '네. 문제인 건 맞는데. 어르신, 그 힘든 걸 전 이미 해냈는걸요. 훗.' 하면서 일종의 쾌감을 느꼈었다.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 영어 공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내 만족을 위한 공부에서 오는 묘한 우월감이었다.
한편 이달 초에 카톡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업무 관련 자격증 보수교육 안내 문자였다. 영어공부를 시작하고 얼마 안 돼 비슷한 시기에 딴 자격증이었다. 회사에서 내 차례라며 교육을 보내줬고, 시험에 붙어야 된다고 해서 땄던 자격증이었다. 그게 벌써 두 번째 보수교육을 받을 정도로 세월이 지났다.
당시에는 분명 공부를 했으니까 자격증을 땄겠지만, 나는 지금 그때 배운 내용의 단 하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회사에서 시키니까 업무에 도움될 줄 알고 따긴 땄는데 막상 실무에 써먹어 본 기억도 없다.
대학에 가기 위해 국영수를 공부했으나 지금 머리에 남은 건 화랑의 후예라는 소설 한 편(그 와중에 국어는 상당히 좋아했다...), 꿈이 있어 공부했던 법학과 사학은 말이 전공이지 비전공자보다도 더 아는 게 없고, 단시간에 일반상식과 영어를 공부해서 입사해보니 상식과 영어 둘 다 안 되는 무리 사이에 끼어있게 되었다.
연속성 없는 내 공부의 역사가 서글퍼 헛웃음이 났다. 뚝뚝 분절된 삶 가운데서도 그 순간순간은 참 열심히 살았던 것도 같은데 이 조각난 이력들은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좀처럼 잘 꿰매 지지가 않는다.
자격증 보수교육 기한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쓸모는 희박해도 그나마 회사에서 건진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라 유지는 해야 한다.
죽을 때까지 붙잡고 가야 할 몇 가지를 찾아 헤매느라 얕은 지식들을 성실히도 쌓아온 내가 대견스럽지만, 이제는 귀 팔랑팔랑 거리는 어설픈 범생이 코스프레는 그만두기로 한다.
지금부터 공부하는 영어 단어 하나하나에도 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단어들이 연결되는 문장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