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 모르겠다. 퇴근하겠습니다

by 앤디



내 삶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더라도 순간순간 BGM이 깔리는 순간이 있다. 어제 강연이 끝나고 집에 가기 위해 차에 시동을 켜는 순간이 그랬다. 라디오에서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고 기가 막히게도 노래의 첫 소절이었다.


오래 버텼네 참나 오래 버텼어
이 나이 먹을 동안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았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첫 가사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어차피 차에 나 혼자뿐이었는데 노래가 끝날 때까지 숨죽이고 노래를 들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DJ의 멘트가 이어졌다. 많은 분들이 왜 그렇게 이 노래를 좋아하실까요? 페이소스가 있어서? 듣고 보니 참 적절한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네. 페이소스... 얼른 노래를 검색해봤더니, 장미여관의 '퇴근하겠습니다'라는 곡이었다.


이 노래를 끝까지 들어보면, 단순히 오늘 하루 퇴근하겠다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래 가사대로 '나 이제 행복 찾아 멀리멀리 떠나렵니다. 그래서 퇴근하겠습니다'라는 그런 내용이다. 특히 노래 말미에 '그만두겠습니다 나 그만둡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인생 한 번 걸어볼랍니다 퇴근하겠습니다'라는

가사에서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 나왔다. 저렇게 지르고 나서 얼마 안 가 먹고사는 걸로 막막해지는 순간이 오겠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몹시도 부러운 그런 상황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내가 미리 신청해뒀던 여러 강연들이 취소되거나 미뤄졌다. 이 강연도 미뤄지고 미뤄지다가 겨우 시작하게 된 수업이었는데, 본 강의 전에 다른 강사분이 들어오셔서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 분이 쿠션 멘트로 수강생들에게 심리테스트를 하나 해주셨는데, 좌뇌 우뇌 중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테스트였다. 내가 속한 유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팀워크를 요구하는 일이나 정형적인 업무는 피하는 게 좋다'라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피하는 게 좋다는 그 일들이 전부인 회사를 월화수목금 다니는 내가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내가 작정하지 않아도)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사는 내가 노래 가사처럼 저지르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저번 주, 일 때문에 다른 부서 책임자 분이 우리 지점에 오셨었다. 나는 그분과 한 번도 일을 같이 해 본 적이 없어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마침 다른 직원들로부터 얼마 전에 그분이 이사를 갔다는 얘기를 들어서 자연스럽게 그 얘기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파트 값, 부동산 재테크 등으로 이야기가 번져 나갔다. 회사의 다른 동료들에 비하면 이런 분야에 뒤늦게 관심을 가진 탓에 아는 바가 별로 없었던 나는 누가 봐도 애 참 모른다 할 정도의 헛소리를 늘어놓게 되었다. 내 수준을 간파하신 팀장님이 김대리, 김대리는 그냥 저축이나 하면서 살아. 이렇게 놀리는 것으로 대화가 끝이 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월급쟁이의 뻔한 월급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재테크 방법을 들은 기분이었다. 종잣돈을 모으고 대출을 껴서 분양을 받거나 아파트를 산다. 아파트 값이 뛰면 그 아파트를 처분해 차액으로 아파트 평수를 늘리거나 좋은 위치의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10~15년간 자녀들의 교육이 끝나면 그 아파트를 팔고 다시 저렴한 가격대의 아파트가 형성되어 있는 동네로 이사를 나온다. 일단 아파트를 사야 돼라는 팀장님의 신조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요즘 회사 직원들의 아파트 값이 올랐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누구는 1억이 올랐고, 누구는 2억이 올랐다고 했다. 서울에 비할 건 아니더라도 정부 부동산 정책의 풍선효과로 인천의 아파트 값도 들썩였기 때문이었다.


경제와 재테크 무식자인 내가 봐도 부지런히 월급을 모아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바꾸고 그 가치 향상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세상이다. 다만 나는 그 월급을 받는 곳에서의 생활이 나와 맞지가 않아서 월급을 전제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울 수 없는 것뿐이다. (써놓고 보니 많이 대책 없어 보이긴 한다...) 여하튼 나의 관심은 월급이 없는 상태 혹은 월급을 대체해야 할 무언가가 있는 생활 쪽으로 향해있어 점점 더 다수의 회사 사람들과 말의 핀트가 맞지 않고 있다. 그분들이 하는 말은 나에게 와 닿지 않는 말들이 대부분이고, 나 역시 그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별로 없다.






어제 오랜만에 재개한 수업은 철학 수업이었다. 사실 어제 나는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아 사무실에 있는 내내 일에 집중을 못했다. 하루 종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속도 좋지 않아 퇴근하고 바로 집에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수업을 듣는 내내 빠지지 않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컨디션이 좋아진 기분마저 들었다.


금수저가 아닌 사람이 자본주의 한복판을 살면서 좋아하는 것 족족 돈과 상관없을 때 이건 참 당혹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관심을 갖는다고 다 돈 버는 건 아니겠지만) 이런 현실에서, 이렇게 생겨먹은 내가 도태되지 않고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자 회사에서 신청한 사이버 연수로 부동산 관련 수업을 여러 개 신청했다.

먹고사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서 등의 세속적인 욕망 때문이었다. 수업을 듣기 전부터 괜히 머리가 지끈거리고 배가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노래 속 화자의 화끈한 결정이 부럽긴 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기엔 이것저것이 머릿속을 스치는 나이가 돼버렸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와 믿을 구석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빨리 "퇴근"하고 싶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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