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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Aug 07. 2020

그가 꿈에 나왔다


요즘 꿈 자체를 잘 꾸지 않는데, 어제 연예인이 나오는 꿈을 꿨다. 평소 호감을 가지고 지켜보던 연예인이라 솔직히 그가 꿈에 나온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꿈속에서 가슴 콩닥거림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얄궂은 직장인 무의식이 그 와중에도 작동된 것인지 이러다가 너 지각하고 말지 하는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예쁜 드레스 같았던 꿈에서 밤 12시가 지난 신데렐라의 누더기  같은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남세스럽지만 분명 나는 꿈에서 행복했다.

출근을 하고 나서도 그 여운이 가시질 않아 '연예인이 나오는 꿈'을 검색해보았다. 현실에 대한 강한 욕구불만과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극도의 스트레스가 강하게 뒤섞여 낯부끄러운 판타지를 자아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예인이 나오는 꿈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했지만 대체로 길몽이었다.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살짝 거슬리는 대목이 하나 있었는데 연예인이 나에게 고백을 하면 길몽이지만 내가 연예인에게 고백을 하면 흉몽이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어젯밤 꿈을 곱씹게 되었다. 꿈속에서 그와 나는 지인이었고, (참으로 당연하게) 나 혼자 애정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고백은 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꿈에서조차 짝사랑의 초기 증상을 보인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고백을 안 해서 흉몽으로 치닫지 않은 내 자신 칭찬해하는 모습이 웃겨서 그렇게 설레었던 꿈이 순식간에 개꿈처럼 느껴졌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나는 친한 대학 동기들과 모교를 방문해 과방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지금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때도 졸업한 지 꽤 지난 터라 행여 까마득한 후배라도 마주칠까 몹시 두근두근했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다행스럽게 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과방을 점거한 우리들은 들어가자마자 우리의 지난 흔적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갈기갈기 찢어 불태우고 싶은 충격적인 사진들도 있었지만... 너무나 고맙게도 후배들이 우리의 학번 노트 시리즈를 버리지 않고 잘 간직해주고 있었다. 과방에 굴러다니던 그 학번 노트에는 참을 수 없이 사소하고 하찮은 우리의 손글씨 기록들이 가득했다. 기록의 주인이 자기가 누구라고 밝히지 않았어도 우리 모두 글씨체만으로 누가 쓴 건지 쉽게 알아챘는데, 야 우리가 이랬었냐 하면서 한참을 과방에서 낄낄거렸다. 도서관보다는 과방 죽순이었던 나의 글도 여러 번 등장했는데 그중 인상적인 구절이 하나 있었다.


애들아, 어디서 본 건데 고백하다 거절당하면 IQ가 25% 감소한다는구나... 커플도 좋지만 잘 보구 고백하렴~ 안 그럼 돌 된다...


 스무 살의 나는 대체 어디서 뭘 보고 다녔길래 저런 걸 썼을까도 웃겼는데 내 글 바로 밑에 달린 손글씨 리플이 너무도 웃기었다.


"그래서 니가...? ㅋㅋ~~ "


 곧바로 아, 이 새끼가... 했던 건 글씨체만으로도 이 냉철한 리플의 주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짝사랑은 했어도 고백을 일삼는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나의 십 년 뒤를 내다볼 줄 알았던 이 녀석의 선견지명이 훗날 투자신탁운용회사에서 일하는 본인의 업에 도움이 됐을까 궁금해졌다.







 연예인 꿈을 꾸다가 약 20년 전의 학번 노트까지 떠올리다 보니  흉몽이 돼더라도,  IQ가 25% 감소하더라도 고백을 하고 싶을 정도의 사람이나 상황 좀 마주했으면 좋다는 바람이  생긴다.

 어제 꿈에 나온 탓에 새삼스레 검색한 그 연예인의 최근 기사는 '수재 구호 1억 원 쾌척'이었다. 삭막하게 쩍쩍 갈라진 어느 직장인의 아침을 촉촉하게 열어준 것도 감사한데, 참 하는 행동마저 훈내 폴폴이다. 많은 사람들이 열광할 때도 단 한번 눈길 주지 않았던 박새로이 이야기를 이번 주말에 정주행을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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