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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12. 2022

멸종위기의 인간


회사 근처에 맥주와 와인 등등 술을 파는 가게가 생겼다. 퇴근길에 두세 번 정도 들렀는데 만족도가 높다. 특히 심하게 억눌렸던 해외여행에 대한 욕구를 여러 나라에서 온 맥주들을 고르면서 푸는 재미가 쏠쏠하다.  

갔다 왔던 나라들의 맥주를 사서 마시며 그곳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나라 맥주를 사서 술부터 예습하기도 한다.


나의 경우 보통 가고 싶은 나라와 도시를 선정할 때 평소 그 장소에 대해 갖고 있던 이미지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때때로 (별다른 지식과 정보가 없음에도) 순전히 이름에 끌려서 간 적도 꽤 된다.  

 대표적으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가 그랬다. 막상 그 뜻을 알고 나면 심오함이 없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어감만으로 멋이 흘러내리고 끌리는 명칭들이 있다. 사람 이름에 빈이 들어가면 어쩜 이름부터 예쁘고 잘생겼잖아, 근거 없는 기대감이 생기는 느낌과 비슷하달까.

 여하튼 이렇게 부다페스트처럼 이름만으로 관심이 생긴 나라가 또 생겼는데 바로 발트 3국이다. 발트 3국이란 이름부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라는 세 국가의 이름들이 모조리 다 끌린다. 휴가 전 퇴근길에 들린 가게에서 리투아니아 맥주를 보았을 때 조금의 망설임 없이 바구니에 담은 것도 순전히 그런 이유였다.




 조계사 view를 배경 삼아 호텔에서 홀짝 거리는 것을 상상하며 옷가지와 함께 싸들고 갔는데, 휴가 첫날 충분히 술을 먹어서인지 리투아니아 맥주는 마시지 못했다. 그런데 왠지 코로나에서 좀 더 자유로워지면 조만간 진짜 리투아니아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을 것만 같다.






 휴가 둘째 날, 카메라와 메모지 펜을 챙겨 들고 가보고 싶었던 북카페로 향했다. 주차장이 협소하단 글을 보고 호텔에 차를 둔 채 버스를 타고 갔다. 마침 호텔 앞에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간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내가 운전했다면 놓쳤을 많은 장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에서 내리기 바로 직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와 통화하느라 지도를 보지 못한 채 걷다가 길을 잃었다. 나중에 보니 정말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래도 괜찮았다. 휴가였고,  햇살이 미치게 좋았고, 길을 잃어서 뜻밖의 장소도 알게 되었다. 평소에는 나의 일정을 지체하게 하는 상황과 나의 계획을 방해하는 사람에 대해 관대하기 쉽지 않다. 원치 않게 내 시간이 갉아먹혔단 생각에 분노가 치솟을 일도 여행 중에는 그저 다 괜찮아진다. 일상에서도 덕분에 하나 또 얻어가고 배웠네요 하면 좋으련만, 원치 않았던 세상살이 잔기술과 억지 교훈은 매번 나를 옹졸하고 지치게 만든다.





 헷갈리는 지도 안에서 겨우 내 위치를 추정한 뒤, 동물적인 감각을 총동원해 결국 북카페에 이르렀다. 여행의 분위기를 한 껏 끌어올리고자 나의 첫 끼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크로와상으로 주문했다. 금요일 오전이었는데도 사람이 어찌나 많고 시끄러운지 인기 많은 장소에서 고요와 평화를 기대한 건 참 순진한 발상이었다. (나 역시 휴가를 내고 갔지만) 죽상으로 일하고 있을 평일 오전, 어느 한쪽에서는 이렇게나 여유 있는 사람이 많단 사실이 놀라웠다.

 

 그 와중에 운 좋게 자리를 잡고 아아 한 모금을 들이켠 다음 크로와상을 베어 물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한참 동안 남산타워를 바라보니 다음 주 하루 이틀 정도는 약발이 가겠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음악과 풍경에 젖어 챙겨 온 메모지와 펜을 꺼내 들었다. 추억이 단 하나도 없는 곳으로의 여행이 마음에 도움이 된다고 썼다. 감정의 주테마가 상실과 슬픔일 때는 되새길 감정이 아무것도 없는 장소가 편하구나 하는 생각이 정말 들었다. 낯선 길과 풍경 안에서 목적지 찾기에 집중하다 보면 잠시나마 그런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든 생각들을 메모지 두 장에 끄적거리다 카페에서 나왔다.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는지 내가 앉았던 자리를 누군가 무섭게 채갔다. 방송을 탔거나, 바이럴 된 곳은 되도록 월화수목에 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윤동주 시인의  문학관에 들렀다. 있는 줄도 모르고 버스에서 내렸다가  발견한 곳이다. 진짜 보물은 이렇게 늘 뜻하지 않는 곳에 있다. 문학관에 들어서서 그의 발자취를 접하고 너무도 익숙한 시들을 읽어 내려가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십 평생을 그렇게 살지 못한 까닭에, 바른 생각이 삶이고 삶이 곧 바른 생각인 사람을 보면 그렇게 숙연해지고 부끄러워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생각 자체가 아예 없거나 대체 왜 저딴 생각을 굳이 삶으로 구현해서 죄 없는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지 했던 종족들을 떠올린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큰소리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은 세상에서 난 또 한 번의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만다. 살면 살수록  내 삶의 모양새가 평범한 다수의 삶과 점점 멀어진다고 느낄 때, 도덕적으로나 일적으로 가당치 않은 사람들이 회사와 세상에서 승승장구할 때 이렇게 내 방식대로 쭉 살다가는 멸종하는 건 나뿐이겠구나 하는 위기감이 늘 있었다.


그래서일까. 뜨거워진 가슴 한편이 어루만져지는 느낌이 들었, 그의 문학관에 들르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에 그런 척 흉내라도 한 번 내볼 수 있을까. 생각하는 대로, 진짜로 사는 삶에 대해 곱씹으며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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