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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Sep 30. 2021

나에게로 이르는 길


꽝꽝 얼려진 얼음들을 꺼내 갓 내린 커피 안에 담근다. 5월부터 시작된 90일간의 병가기간 동안 단 하루도 빠트린 적 없는 일과 중 하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지 않고 직접 만들어 마시는 건 회사에 출근할 때는 엄두도 못 내던 일이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고른 컵은 아니었는데, 여유로운 아침 의식을 함께 하는 유리잔에는 글귀가 하나 적혀 있다.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데미안”


 어쩌면 나의 무의식은 커피뿐만 아니라 이 문장을 함께 마시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자는 논어에서 40세라는 나이를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다 하여 불혹이라 칭했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만큼 이제는 그보다 한참 뒤의 나이를 불혹이라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직장생활 12년 차, 낼모레 마흔에 새삼 얻은 병은 ‘적응 장애’였다.

밤에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고, 회사에 앉아있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춘기적 증세 하나 없이 무난한 학창 시절을 보내왔기에 처음에는 이런 증상들이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40여 년간 몸담고 있었던 나의 세계는 여기저기 부서지고, 그 균열로 인한 통증은 머물던 시간에 비례하여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의 틀에 대해 늘 자신만만했었는데, 종국에는 그것마저 휘청거리니 아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태의 나라서 「데미안」을 읽는 내내 가슴 절절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에밀 싱클레어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고, 데미안의 지혜들은 어떻게든 양손에 쥐어 보려고 애를 썼다. 10대 후반에는 그렇게 읽으려고 애를 써도 읽어지지 않더니, 무려 20년 만에 데미안 완독에 성공했다. 꽃마다 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듯 좋은 책이라 해도 그게 와닿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른 모양이었다.


보통 자기가 원래 속해 있는 세계는 편하고 익숙하다. 싱클레어가 느꼈던 아버지의 세계처럼 지극히 맑고 정돈돼있는 것까지는 아니라 해도 분명 그것이 주는 아늑하고 따스한 면이 있다. 그래서 굳이 그 ‘밝은’ 세계를 깨부수고, 그 세계의 종속을 거부하는 일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길로 가는 것은 괴롭고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와야 할 것은 갑자기 나타나고,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경험하게 될 거라는 데미안의 말처럼 사는 동안 올 것은 오고, 경험해야 할 것은 결국 겪게 된다.


 싱클레어는 크로머라는 친구에게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친 일)을 거짓으로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도적질과 거짓말이라는 죄 안에 가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막연히 인식만 하고 있었던 ‘다른 세계’를 현실에서 마주한다. 그 세계는 그릇된 양심과 불안이 있고, 다른 말을 이야기하고, 다른 것을 요구하는, 전혀 다른 냄새를 가진 세계다. 아버지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강렬한 경험은 데미안을 만나고 나서 심화된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를 밝고 깨끗한 세계에 살고 아벨이라고 여기는) 싱클레어는 겁쟁이에 대해 조소적으로 말하는 데미안을 일종의 카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부친의 밝은 세계와 슬기를 경멸했던 내면의 충동, 본인의 잠재적인 소망을 발견하면서 기존에 갖고 있던 인식의 균열을 체험한다. 싱클레어가 크로머라는 존재로 인해 다른 ‘세계’를 접했다면, 데미안으로 인해 다른 ‘인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싱클레어가 일반적인 인식에 대한 의심과 비판을 시작하게 된 것도 데미안이 카인과 그의 표시에 관한 의견을 제시한 바로 이 지점부터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로 하여금 크로머라는 두려움에 대한 종속, 밝은 세계로서의 부모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라고 종용하기도 한다. 싱클레어는 그 과정에서 데미안에게 의지하려 했던 자신의 한계와 찾으려 했던 것이 결국 새로운 종류의 ‘종속’이었음을 인정한다.

이런 방황 속에서도 싱클레어의 여정이 울림을 주는 것은, 이 세상에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만큼 험난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로 뛰어드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헛디디기 쉬운 오솔길, 폭풍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싱클레어의 모습은 구도자를 연상시킨다.


 그 여정에 각자의 진리로 힘을 실어 준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피스토리우스와 에바 부인이다. 피스토리우스는 세계를 자기 가운데에 갖고만 있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은 굉장한 차이를 갖고 있으며, 그런 인식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 모두에게 인간이 될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알려는 사람보다 포기하는 쪽이 더 많다.


 에바 부인은 “누구한테나 길은 이렇듯 곤란할 것일까요?”라는 싱클레어의 질문에 태어나는 일은 늘 곤란하다며, 새가 알에서 나오는 데 겪는 고통을 상기시켜준다. 그러면서 그 길을 뒤돌아봤을 때 자기가 걸어온 그 길이 그저 곤란하기만 했는지, 동시에 아름답진 않았냐고 되묻는다.

 자기 자신의 길보다 더 아름답고 편한 길을 알고 있었는가,라고 묻는 부분에서는 자기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모든 싱클레어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이 들어서 내 마음이 다 먹먹해졌다.


「데미안」은 말한다. 누구나 한 번은 부친이나 선생이라는 기존의 세계로부터 자기를 떼어놓는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고.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그 길은 고독하고 괴롭기 마련이라고. 여기에 (내세울 것 없는 인생 경력을 비추어) 한마디 보태자면 그 걸음은 어릴 때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새가 빠져나오려고 하는 알은 하나가 아니고, 고정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알은 정말 세계이다.


오늘도 나는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알이 파괴된 이전과 이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고통스럽지만, 부디 이것이 나에게로 이르는 길 위의 유의미한 한 걸음이기를 바랄 뿐이다. 


누군가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너무 어린 나이에 읽진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검은 거울 위에 몸을 숙여도 나의 벗이자 인도자인 「데미안」을 닮는 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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