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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20. 2022

추앙해변이 아닌 추암해변


회사 메신저로 공지 쪽지가 떴다. 쏠비치 삼척 예약이 언제 언제로 되어있으니 원하는 직원들의 선착순 신청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가야 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원래 즉흥적인 여행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렇게 쪽지를 받자마자 덜컥 신청을 해버렸다. 너무 갑자기라 가족도 몇몇의 친구들도 모두 시간이 안되어 결국 나는 혼자 삼척으로 떠나게 되었다.


 여러 가지가 딸려있지 않는 삶이 이럴 땐 썩 괜찮게 느껴진다. 나만 마음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실제 떠나며 살아왔다. 코로나와 개인적인 사정들로 그동안은 그럴 흥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정말 오랜만에 혼자 떠나는 장거리 여행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씻지도 않고 대충 짐을 싸서 운전대를 잡았다. 티맵의 예상 소요시간이 4시간이 넘었다. 삼척, 참 멀긴 참 멀구나 그 거리는 했지만 운전하 나만의 플레이 리스트들을 듣는 것을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중간중간 차가 막혀서 미치게 지루했던 순간도 음악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4시간을 넘게 달려 동해 바다가 보이는 순간부터 역시 오길 잘했다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쏠비치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티맵 화면에 추앙해변이 떴다. 추앙해변?! 이런 해변이 있었어? 아, 이것은 운명인가?!

너무 깜짝 놀라 운전석에 기댔던 등을 떼고 자세를 고쳐 잡을 정도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읽어보니 추앙이 아니라 추암이었다. 깊은 실망감이 밀려왔고 여전히 씨를 보내주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나란 자가 웃겨서 웃음이 났다.


 추앙이 아닌 추암해변을 지나 쏠비치에 도착했다. 5인실인데 몇 명이 묶으시냐는 말에 혼자 왔다 하고 야무지게 오션뷰 비용까지 추가 결제한 뒤 카드키를 받았다. 싸들고 간 맥주와 마스크팩을 냉장고에 넣고, 오션뷰를 잠시 감상한 뒤 샤워를 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온 여행이라 뭐라도 찾아보려고 로비에서 들고 온 여행 브로셔를 들춰보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차도 밀렸고 콘도 사람들로 바글거려서였는지 (관광지에 와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내는 소리, 아니 소음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삼척에서의 첫 방문지는 천은사였다. 사람들이 정녕 안 가는 곳이었는지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지나가는 차 한 대가 없었다.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분들이 운전하는 자전거, 경운기 정도만 내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절에 도착했을 때진짜 아무도 없었다. 절 관계자분들과 풀을 베는 분이 내는 인기척이 있었지만 절을 둘러보는 내내 단 한분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천은사는 생각보다 작은 사찰이었다. 고려시대 이승휴가 이곳에서 제왕운기를 저술했다고 한다. 정작 제왕운기가 뭐였는지는 가물가물했지만, 이승휴ㅡ제왕운기 이렇게 달달 외웠던 기억이 났다. 이승휴 유적지에 대한 설명글을 읽는데, '이승휴는 어렵게 벼슬을 얻었으나 강직한 성품 탓에 여러 번 좌천되었다'는 대목에서 계속 시선이 멈췄다. 이제 나도 모르지 않는데, 이런 원인과 결과를 담고 있는 문장은 여지없이 비문처럼 느껴진다.

그때 내가 외워야 할 것은 [이승휴ㅡ제왕운기]가 아니라 [강직한 성품ㅡ좌천]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사찰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나니 250년이 된 느티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내가 아직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들이었다.




 어마 무시한 세월을 담고 있는 자연 앞에 서면 압도당하는 것을 넘어서서 공포심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 나무들 앞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던 거지 하는 생각이 들자 나무한테 나의 질함이 모조리 읽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경외심이 든 그 나무 앞에 오래 서 있고 싶었는데 온갖 벌레들이 들러붙어 차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놀러 간 기분에 취해 평소보다 오버해서 향수를 뿌려댔는데 아무래도 벌레들 입장에서 인공의 냄새를 뿜어대는 나를 참아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벌레들한테 쫓겨 나와 40년 전통의 막국수집에 가서 회 비빔국수와 메밀전병을 포장했다. 맥주와 먹으려고 맘스터치를 검색해 치킨 반마리까지 구입했다. 아주 천천히 몇 번에 나눠서 맛있게 먹어치웠다. 여행 가서 마시고 반해버린 라오스 맥주와의 페어링은 너무도 완벽했다. 맥주 한 캔과 한 병에 달아오른 얼굴에 차가운 마스크 팩을 얹고 집에서도 못한 숙면 취했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오기 전, 차로 지나가기만 한 새천년해안도로를 다시 찾았다. 여기에 차를 대야지 하고 봐 뒀던 곳은 전체 도로의 중간쯤에 있었던 조각공원이었다. 원하게 불어오는 바다 바람,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풍경. 그야말로 탁월한 위치 선정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평소 야외공연이 있는 장소였는지 내가 도착했을 때 밴드 연주자분들이 현철의 사랑은 나비인가봐로 합을 맞추고 있었다. 날카로운 가사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였지만 그날의 풍경 그날의 내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았기에 바다가 보이는 모퉁이에 서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 왼쪽 이어폰이 귀에서 빠져나가더니 애매한 위치에 굴러 떨어졌다. (귓구멍이 비정상적인 건지) 평소에도 잘 빠져서 결국 여기서 이렇게 잃어버리는구나 체념하다 자세히 보니 버젓이 보이지만 손 닿을 수 없는 곳에 놓여있었다. 차라리 바다 쪽으로 떨어져 버렸다면 깔끔하게 뒤돌아서겠는데 잘만하면 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위치였다. 그렇다고 직접 내려서 줍자니 잘못했다가는 돌 위로 추락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 이어폰이 떨어진 바닥이 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머리를 굴린 끝에 차 트렁크에 있던 우산을 가져와 휘둘러보았지만 짧은 팔로 어림없었다. 우산 하나를 더 가져와 어설프게 연결해서 우산 두 개로 써보았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고가의 이어폰도 아니고 내 귓구멍과 맞지 않아 자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이어폰 한 짝이 포기가 안되었다. 경계에 걸쳐 아슬아슬하게 굴러다니는 꼴이 꼭 나 같기도 했고, 버릴 때 버리더라도 이렇게 황당하게 널 버려두고 갈 수 없다는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바람이 불어도 절대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이어폰이 제발 날 좀 구해줘 하는 것만 같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이어폰이 떨어진 곳을 잘 살펴보니 그곳은 데크 밑에 있는 영업장의 천장이었다. 그 영업장의 입구로 가서 간판을 보니 카페였다. 우산보다는  마포 자루라도 빌려 볼 요량으로 카페에 들어갔다. 그냥 부탁드리긴 죄송하니까 커피라도 주문하려고 들어갔는데, 생각지도 못한 삼척 바다 뷰가 눈앞에 펼쳐졌다. 커피를 주문하고 나의 상황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했다. 사장님인지 직원인지 모를 남자분이 나오셔서 이어폰이 떨어진 곳을 확인하셨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깟 이어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까지 폐를 끼치고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싶진 않았다. 보시고 안될 것 같으면 버려도 되니 말씀해달라고, 허락만 해주시면 제가 직접 시도만 좀 해보겠다 했다. 그런데 그분이 아니라며  빗자루로 직접 내 이어폰을 구해주셨다. 조금이라도 다치실까 봐 너무 조마조마하고 걱정됐는데 다행히 그분에게 아무 일도 없었고 이어폰다시 내 손에 쥐어졌다. 감사하다고 몇 번을 말씀드리고 그제야 주문한 플랫화이트를 마셨다. 난 그곳에 카페가 있는지조차 몰랐는데, 이 일로 인해 앞으로 삼척에 가면 여긴 꼭 들리겠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삼척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니 돌아와서도 계속 새천년해안도로에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시도 한 번 해보지 않고 이건 안돼 하며 쉽게 돌아섰던 나로부터의 탈출이 이번 여행의 의미였나로 연결시키면 너무 지나 과장일까.


 생각지도 못한 사건으로 시간을 써버린 바람에 새천년해안도로 다음으로 들리려고 했던 추앙 아니 추암해변은 둘러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삼척에 다시 가야 할 이유가 자그마치 두 개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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