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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Dec 01. 2022

그렇게 책임자가 된다


회사로 인한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을 때, 내 병명을 진단하기 위한 검사를 해주신 임상심리사님이 내 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면담을 하고 난 이후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처럼 일에서 보람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과도한 소비를 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임상심리사님은 일에 대한 만족도가 크신 탓에 돈을 써서 기분을 풀어야지 하는 마음이 잘 안 든다고 하셨다. 일을 하면서 되려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기 때문에 돈으로 풀어야 할 스트레스가 쌓일 일이 별로  없다는 의미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기에, 그 말이 부러우면서도 기이하게 여겨졌다. 물론 나는 그게 아니어도 소비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일에 대한 불만족을 내 온갖 소비의 핑계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임상심리사님이 말씀하신 '과도한'에는 분명 회사와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영향을 끼친 게 사실이었다.


 이번에 여행 가방을 싸기 위해 방을 구석구석 살필 때도, 내가 이런 것도 샀었나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돈을 써서 채워질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짓누르는 고질적인 공허함을 떨쳐보고자 기억에도 없는 소비를 끊임없이 저지른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내가 얻은 건 꽉 찬 마음이 아니라, 물건으로 꽉 찬 방이 되었다.

 나와 맞지 않은 옷을 입어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돈을 벌어놓고는, 나답지 않게 번 돈이라며 아까워하지 않는 이상한 심리도 과도한 소비에 불을 붙였다. 매일 아침 도살장 끌려가듯 회사를 다니면서, 그 돈을 모아 하루빨리 나가야지 하는 생각 대신 매월 맞는 월급 뽕에 취해 비틀거렸던 형국이랄까.






 오늘은 지점장님이 잠깐 얘기를 하자고 하셨다.

나를 부르신 요지는 중간 책임자로서의 역할과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뒤늦게 굴욕적으로 한 승진도 승진은 승진인 거고 어쨌든 조직이 내게 자리를 줬으니, 충분히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지점장님 말씀 말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승진 이후 갑자기 바뀐 업무에 대한 적응을 하느라 정신도 없었고, 내 역할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시야도 없었기에 분명 도움이 되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 누구로부터) 지적받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질 때문 에라도 회사에 적을 두고 있는 동안에는 그 역할을 어떻게 해서든 해야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런데 오늘 하루 종일 가슴속 내 큰 구멍이 '그래 난 한 번도 작아진 적이 없어, 여전히 그 크기야.'라고 소리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건지는 몰라도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지점장의 말의 이면에는 내가 일주일 휴가 간 사이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책망이 함께 있었다. 내가 부재한 동안 벌어져서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었던 것이 나의 부족함으로 싸 잡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제 지점 회의 때 나는 업무 처리에 관한 지점장님의 의견에 전면으로 맞섰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를 댔기에 결과적으로 내 의견대로 가게 되었지만, 그것 때문에 나는 지점장님 말씀하시는데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돼먹지 못한 애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회의 내용을 적다가, 무의식 중에 원을 여러 개 그린 것이었다)

 

 이제는 시절이 좋아져(?) 상사여도 윽박과 고성을 함부로 내뱉을 수 없기에, 중간 책임자로서의 역할과 태도에 대한 대화라는 세련된 명분이 더해졌다. 지금껏 회사에서 봐 왔던 상사의 모습과 달리,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아 조심스럽게 포장하는 모습에서 정말이지 격세지감을 느꼈다. 바깥세상에 비하면 말도 못 하게 더딘 이 바닥도 조금씩 변하기는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고맥락 문화로 쩌든 대한민국의 조직, 그것도 공공기관에서 상대방이 제시한 내용 그 자체에 비중을 두는 우를 범하는 건 그야말로 중간 책임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일주일 씩 휴가로 자리를 비워서 피곤한 일을 만들게 하지 말았어야 하며, 이유를 불문하고 감히 지점장 의견에 맞서서 생각을 피력하는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의 늦은 승진에는 다 이유가 있었고, 새삼 또 버틸 자신감 대신 무력감을 얻는다. 용케도 오늘 면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소환되더라도 더더욱 입을 다물겠노라 가슴에 새긴다.






 이딴 건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써먹을까 하는 걸 오늘 또 한 수 배웠다. 가슴속 구멍이 1cm 더 커진 거 같긴 한데, 과도한 소비에 1을 보태진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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