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디 Mar 05. 2023

마흔 살의 어른 아이


 얼마 전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 친구를 만났다. 가기로 한 식당까지 같이 걷는데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 저번에 내가 말한 그 드라마 봤어? 그동안 네가 회사 얘기 할 때마다 사실 이해 잘 안 됐었는데 나 그거 보고 완전... 네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겠더라.


일단 친구가 말한 드라마의 배경이 나의 회사와  다르기도 하고 아직 못 봤기 때문에 그 드라마가 얼마나 현실 반영에 충실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분명한 건 굳이 퇴근하고 나서 내가 속한 현실의 답답함을 되새기고 싶지 않기에 친구가 그 드라마를 언급한 순간부터 직감했다. 내가 그 드라마를 볼 일은 아마 영영 없을 거라는 것을.






 친구의 말에 나는 다른 얘기를 했다. 나는 너를 만나기 바로 전 날, 가와이 하야오의 울보 하야오를 읽었고 그 책이 나로 하여금 영화 벌새를 소환해 영화까지 감상하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융의 분석심리학을 맨 처음 일본에 소개한 심리학자인 가와이 하야오는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들 중의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저자다.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듯이 울보 하야오는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다.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소설 속 하아 짱이 겪는 어린 시절의 일과 감정들이 비단 그의 것만이 아님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가벼운 문체로 써진 글임에도 읽는 데 속도가 안 났던 건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 것'을 끊임없이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하아 짱은 다 자란 줄 알았지만 아직 덜 자란 모든 어른, 그들 마음속 아이의 원형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는 내내 내 정체성(한국, 여자, 80년대 초반 출생)과 쩍 하니 달라붙어 있는 영화 벌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보라 감독의 단편 영화 리코더 시험 속 9살 은희는 5년이 흘러 영화 벌새에서 14살이 되어 있었다.

 

 은희의 남자친구에게서 온 삐삐 메시지,

1004 486 486. 얼마 전 회식에서 우연히 윤하의 비밀번호 486 노래 얘기가 번져 삐삐로 나아간 적이 있었다.

 삐삐도 486도 모르는 93년생 95년생들 앞에서 차마 나는 말을 잇지 못했는데 이 친숙하고 편안한 1994년의 시대적 배경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세계가 확장되면, 관계도 확장이 된다. 중학생 은희는 가족이 아닌 타자와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한 뼘 더 성장한다. 이것이 혹시 최초의 사랑이었을까 하는 이름을 뒤집어쓰고 만들어진 관계에는 은희의 남자친구와 은희의 여자후배가 있다.

 나 스스로 자라기에도 바쁜 시기의 사랑이 그러하듯 비교적 단순한(?) 갈등으로 그 모든 관계는 해프닝이 된다. 연애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태는 남자친구와 실현되고 갈등 역시 그를 통해 겪는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친구, 재회했으나 이성교제를 반대하는 엄마 손에 질질 끌려가고만 그와의 한 번 더 이별이 그러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그 야속한 fragile 함은 은희의 여자후배가 가르쳐준다. 은희에게 쭈뼛거리며 꽃 한 송이를 건넸던 그 후배는 학교에서 갑자기 은희를 모른척한다. 은희는 묻는다.


 "너 나 좋아한다고 했잖아. 근데 왜 이래 이제, 네가 그랬잖아 나 좋아한다고."


후배의 대답에 은희는 당황했지만, 나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


 변심에 대해 이 보다 더 명징하고 할 말 없게 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라면 먹을래요?라는 고급진 플러팅을 구사하는 역할이 아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질한 쪽을 담당해 온 나로서는 나이 사십에 뼈아픈 통찰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은희와 후배가 둘이 처음 만나 논 날 노래방에서 불렀던 노래가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이란 점이 의미심장하다.


 은희의 성장에 영향을 끼치는 또 다른 관계의 축은 은희의 단짝 친구 지숙이와 한문을 가르치는 김영지 선생님이다.

  지숙이와 은희가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다 걸린 날, 아버지 연락처 대라는 문방구 주인의 다그침에 지숙이가 은희 아버지 가게이름을 팔아넘기고 도망친다. 은희는 분노하고 둘은 멀어진다.

 후에 지숙은 너무 겁이 나서 그랬다고 은희에게 사과하지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의 배신에 대한 은희의 첫 경험이다. '브루투스 너마저?'의 여중생 버전.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것이 배신의 사전적 의미라는 것을 고려하면, 너무 당연하게도 배신은 가까운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상처다. 우리는 아무나 믿지 않으며 아무에게나 의리를 기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배신은 관계에서 오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중에서도 가장 따갑고 아플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은희와 함께 투톱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한문 선생님 김영지 선생님이 있다. 영화에 수많은 어른들이 등장하지만 은희가 유일하게 좋아하고 따르는 어른이 아닐까 싶다. 그녀가 은희의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 학원의, 한문선생님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학교에서의 역할이 있는 은희 담임 선생님은 아직 사는 의미도 모를 중2에게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담배 피우고 연애하고 노래방 가는 애들은 죄다 날라리라며 날라리 색출작업도 한다. 점입가경으로 마지막에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라는 프로파간다를 큰 소리로 외치게 한다. 학창 시절 나도 갈 수만 있었다면 가고 싶은 대학이 서울대였지만 (1994년도니까 가능한 소리일 거야 하면서) 진짜 껄껄 웃고 말았다.


 반면, 우리 김영지 선생님은 칠판에 또박또박 다른 화두를 던진다.


相識滿天下(상식만천하)

知心能幾人(지심능기인)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내가 중2였다면 솔직히 이해 못 했을 것이다.

그때는 에이급수학, 하이레벨 수학을 왜 유독 나만 못 푸는가가 더 심각했다. 저 문장의 예리한 울림은 이제야 절절하게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나도 서예학원에 다녔었다. 그때의 풍경, 선생님의 음성과 옷차림, 벼루에 갈았던 먹의 냄새를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비록 그때 배운 주옥같은 가르침은 생각이 안 나지만,  살다가 이런 문장을 만날 때 제대로 얻어맞는 감성의 공간을 가질 수 있게끔 (국영수뿐 아니라) 서예학원도 보내준 엄마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일요일 오후 3시가 훌쩍 넘었다. 벌새 영화에 나오는 대사 중 은희와 은희 남자친구가 이런 대화를 나눈다.


나는 이 시간만 되면 기분이 이상해. 너도 그래?

도야? 응. 어떤데? 그냥 외로워. 너무 진지한가?


 영화에서 그 시간이 몇 시라고 알려주진 않았는데 그 시절 나의 외로운 시간은 보통 지금부터 시작되었다. 일요일 오후부터 해가 질 때까지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요동치고 몹시도 외로웠다. 울보 하야오 책에도 하아 짱이 반복적으로 하는 생각이 있다.


 이 세상에 나 혼자 뿐이다. ,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야, 나 혼자뿐이야. , 역시 인간은 결국 혼자야.


 울보 하야오를 읽고 영화 벌새를 보고 난 지금. 내가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다르다고 어렴풋이 느낀 그 최초의 순간,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내가 느낀 '외로움'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그렇게 인지한 나를 나로서 인정하는 과정에서의 고독은 숙명과도 같다.

 

1994년. 그토록 꼬장꼬장해 보였던 한 체제의 상징인물인 김일성이 사망했고, 견고해 보이는 어른들의 세상 한가운데를 가로 짓는 다리 성수대교가 무너져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은희는 자기 얼굴 한쪽의 혹을 떼어냈다. 은희가 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하고 나면 흉터가 남는다는 의사의 말에 은희의 아버지가 꺼이꺼이 우는 장면이 있다. 한 인간이 자라는 동안 안과밖의 세계는 끊임없이 무너지고 그러면서 상처가 생기고 흉터가 남는다. 막내딸 은희가 그 여정의 첫 발을 내디뎠음을 안 아비의 안쓰러움과 걱정이 울음으로 터져 나온 것 같아 갑작스러웠지만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노래방 대신 진짜 서울대를 간 김영지 선생님이 은희에게 말한다.


자기를 좋아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아. 나는 내가 싫어질 때 그냥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해. 아,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 나는 지금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하고.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나는 그 손가락을 튕겨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자신이 조금은 덜 싫어진 느낌적인 느낌.


 마흔에도 여전히 외롭고, 풀리지 않은 의문들 투성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어쩜 이리도 똑같은가.  교복은 정해준 걸 입어도 가방만은 그럴 수 없는 은희처럼 유나이티드 컬러스 오브 베네통의 샛노란 가방을 메고 학교 대신 회사를 가는 것만 다를 뿐.


TMI 보태기> 미치게 좋아하는 노래 장혜진의 '1994년 어느 늦은 밤' 중 가사,

'한참을 그대에게 겁이날 만큼 미쳤었지 그런 내 모습 이제는 후회할지 몰라'

이건 마흔이 돼서야 알게 된 정서.

대체 1994년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매거진의 이전글 이 땅의 마흔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