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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22. 2023

이 땅의 마흔들에게


 오후 6시 땡, 도망치듯 사무실을 빠져나와 지하 주차장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리고 나는 엘리베이터에 비친 내 셔츠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리 소재가 리넨 이어도 그렇지, 분명 아침에 곱게 다려 입고 나온 옷이었다. 여기저기 가늘고 굵은 주름이 패턴처럼 가득 차 있고 볼품없게 꼬깃해진 셔츠는 아침과는 전혀 다른 옷... 아니 그냥 천 쪼가리였다.


 먹고살겠다고 옷이 이렇게 구겨지는지도 모르고 일했구나... 실로 오랜만에 나 자신이 대견하고 밉지 않은 순간이었다.

 

 사무실에서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일의 의미를 못 찾아서 괴로운 거지 일단 출근을 해서 책상에 앉으면 딴짓 한 번 하지 않고 일만 하긴 한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듯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벌써 점심시간이고, 밥 먹었으니 절반이 갔다 좀 만 더 버티자 하다 보면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된다.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몸을 맡기면 거짓말처럼 주말이 짠 하고 다가와있다. 얼마 전, 꽤 긴 휴가를 마치고 회사에 복귀했을 때 생각보다 싫지 않았던 것도 일상의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그 사실에 매번 요란한 의미부여를 하는 나였지만, 마흔은 이전과는 또 다른 컬러의 무게감이 있다. 이십 대 삼십 대의 삶도 녹록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이제 막 4자 달았다고 사짜 같은 수상함을 풍기겠다는 건 아니다.

 나이에 4자가 달린 지금 내 심정을 날 것 그대로 풀자면, '체력 딸리는 건 니 사정이고, 너의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야.'라는 고지를 받은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번 주 나의 마흔 친구(?)들에게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했다.


 지난 화요일에 나와 생년월일이 같은 여자 고객이 방문했다. 그녀가 기대했던 지원이 있었는데, 예약을 놓쳐서 못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내 안내를 덤덤히 받아들이면서도 아쉬워하고 실망하는 기색이 그녀의 얼굴에 스치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오기 직전에 왔던 (마흔 아닌) 고객들 중에도 그런 경우가 있어서 중복 예약건을 찾아 도와드렸기 때문에 행운의 오류가 또 있을지 만무했지만, 나는 예약목록을 이 잡듯이 뒤져서 중복 예약자를 발견했고 결국 마흔 인 그녀가 지원받을 수 있게 했다. 고맙다고 몇 번을 인사하는 그녀에게 저랑 생년월일이 같아서 어떻게 해서든 도와드리고 싶었다 너스레를 떨었지만 실은 당신도 마흔이고 나도 마흔이라 정이 갔다고 말하고 싶었다.

일할 때 만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일로만 대하는 내가 너스레 섞인 대화를 한 것도 스스로 놀랐는데, 정까지 느꼈다니 나 서른 살에 다른 서른 살을 대할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마흔의 남자 고객과 상담을 하는데 그가 분양받은 아파트가 내 것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현재 살고 있는 집도 자가였는데 마흔의 내가 또 뜻밖의 질문을 날렸다. "여기 입주하실 거예요?"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죠, 상황이 어려우면 못 가는 거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봐야죠." 그는 이미 집이 있고 추가로 갖고 있는 분양권이었지만 그의 대답에서 어떤 과장이나 엄살은 느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지금보다 잘 먹고 잘 살려고 은행 대출 껴서 자산을 늘려가는 그 애씀을 조금은 알기에 나랑 동갑인데 나보다 부자네 하는 류의 시기질투는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나는 마흔 인 그가 받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탈탈 털어 지원받을 수 있도록 서류를 검토했다.


 오후엔 내 동생과 동갑이자 나보다 한 살 어린 고객이 "갈수록 돈은 많이 들고, 먹고살기 정말 힘드네요..."라고 말하며 허탈하게 웃는데 그 어느 연령대의 자기 고백보다 절절하게 가슴에 와 박히었다. 말없이 미소로 응대했지만 이미 내 마음은 "힘드냐, 나도 힘들다"라 말하고 있었다.


 주름이 옷에만 나는 게 아니라 얼굴 여기저기에서도 드러나는 마흔, 그 언저리에 대한 동질감 때문일까. 요즘 내 또래를 마주하면 주책맞을 정도로 감정이 북받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에게도 잘 안 하는 파이팅을 옥상달빛의 노래를 빌려 이 땅의 모든 마흔들에게 해주고 싶다.


눈 감아도 돼요. 길었던 하루였죠.
캄캄한 방에 앉아 이 어둠 뒤에 쉬고 싶죠.
혼자라 생각될 때 서로를 떠올려요.
그렇게 우리 오늘을 견뎌요.

옥상달빛  <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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