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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02. 2023

별다를 것 없는 40대의 실연


 출근을 하면 상사가 업무 관련해서 말을 거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래 이곳은 회사고 그 일을 하는 대가로 나도 월급을 받는 거니까, 이 또한 내 의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눈치가 더럽게 없는 지점장은 매번 그 선을 넘고 만다. (겉으론 아닌 척 표정관리를 하고 있지만) 너의 그 말 같지 않은 소리 정말 듣기 싫으니, 제발 그만 좀 닥쳐줄래라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해도 소용이 없다. 모니터를 보며 성의 없이 짧게 대꾸하면 느끼는 바가 있어야 하지 않나? 아님 다 알면서 이 사무실에 있는 한 본인이 왕이라는 알량한 권력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고 싶은 걸까?


 실연에 대처하는 고전적인 수순으로 한 동안 지인들을 불러다가 술을 퍼 마셨다. 40대에도 (내 안의 감정이란 게) 살아있네 라는 것을 실감한 것은 고무적이었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를 꼭 이렇게 아프고 요란스럽게 깨달아야 하는 현실이 생각보다 버거웠다. 여러 날동안 술을 먹어도 해결이 나지 않자, 역시 또 클래식하게 꽤 길렀던 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괴로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 머리까지 건든 건데, 상사는 그 먹잇감을 놓치지 않고 지금 헤어스타일이 저번 머리보다 낫다는 둥, 하긴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게 무슨 소용이냐며 말을 걸어온다. 감사하다는 식상한 대꾸조차 할 힘이 없어 조용히 웃어줬더니 이번에는 왜 그렇게 힘이 없냐고 한다.

 

 표현하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백만 배 힘든 나란 인간의 한계치가 드디어 목구멍을 넘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차마 싸가지 밥 말아먹은 부하직원으로 사고 칠 수는 없어 원래 계획보다 긴 휴가를 냈다. (그리고 나는 화를 내는 것도 애정이라 생각하기에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화를 내는 편이기도 하다) 그렇게 휴가 결재를 올린 당일날 회의시간, 지점장은 다른 직원들에게 내 휴가를 언급하며 (내가 신고하면 모가지 날아갈법한) 성희롱적 발언을 히죽거리며 해대었다. 피 같은 연차를 저따위 천박한 인간으로부터 도망치느라 쓰는 게 짜증 났지만, 1초라도 빨리 저 꼴 보기 싫은 면상과 무식한 세 치 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다 보니 아무래도 요즘 몸상태도 별로인 것 같아 어제는 건강검진을 받았다. 사전문답에 솔직하게 대답했더니, 건강검진 주치의가 경미한 우울증이 있어 보인다고 정도가 심해지면 치료를 받으라고 한다. 나의 우울감에는 늘 명확한 이유가 있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라는 시에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에 가슴 떨려 한 대가인지 뭔지 실제 내 삶이 지난 몇 년간 그랬다. 그래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지 말자는 불가능한 결심을 한 적도 있다. 제 아무리 열정이 차고 넘치는 나지만... 폐허가 되는 것은 너무 무서웠고 망가지는 징표도 무척 두려웠다.


  해에 걸쳐 내가 좋아하는 모든 존재들이 작정이라도 한 듯 인정사정없이 내 곁을 떠났다. 당연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몰랐다. 살아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순 없어 여기저기 헤맸을 뿐인데, 바보스럽게도 폐허에 또 폐허를 만드는 일이 다반사인 나날들이었다. 

 여기에 내 일상과 현실이 그저 그렇기만 해도 좋았으련만, 하필 내 현재의 좌표엔 정확히 내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머리 자른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오랜만에 네일숍에 들러 발톱에 새빨간 젤을 올렸다. 마음의 각질도 이렇게 시원하게 벗겨져 나가 한 큐에 정돈되면 얼마나 좋을까. 샵에서 나와 운전을 하며 최애카페로 이동하다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했던 모든 대상들로부터는 다 버려졌지만... 현실 싫어 미치겠는 이 요소들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제거하는 것, 그건 좀 가능하지 않을까.

 이겨내려고, 극복하려고, 참으려고만 하지 말고 이런 것들은 내가 먼저 버려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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