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듣기 시작한 수업의 강사님이 (수업시간에 많이 언급할 예정이라며) 보길 권한 영화가 있다. 정기구독하는 OTT에서는 제공하질 않아 어쩌지 하고 있었는데 마침 영화 TV채널에서 방영을 해주었다.
그 영화 제목은 폴:600m다.
선생님이 '죽은 남편의 유골을 뿌리러 600m 타워에 올라가는 한 여자의 얘기'라고 했을 때부터 느낌이 왔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죽음으로 인한 관계의 단절, 세상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를 죽음으로 상실했을 때의 경험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류의 고통이다. 주인공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 시퀀스가 오프닝 장면인데 난 거기서부터 눈을 뗄 수 없었고, 바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깊은 슬픔과 방황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주인공 베키의 그것이 전부 다 내 것인 양 온몸으로 통증을 느꼈다.
베키의 아버지는 사실상 폐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베키를 걱정해서 찾아오지만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반대한 아버지에게 시종일관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던 중 베키의 남편 사고 현장에 같이 있었던 베키 절친인 헌터가 찾아와 B67타워에 올라가 죽은 남편 댄의 유골을 뿌려주자고 제안한다. 두려움을 느낀 주인공 베키는 처음에 못 하겠다 하지만, 이내 헌터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실행의 첫 발을 내딛는다. 내가 이 영화에 처음부터 깊은 호감을 가진 여러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허구의 스토리든 실제의 삶이든 굳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 지점, 거기서 주인공 스스로 문을 열고 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맥거핀이 없다. 영화 초반에 등장한 장치들은 아주 중요한 떡밥이고, 의미심장한 복선이다.
타워에 오르기 전 카페에서 헌터가 베키에게 전수하는 생활 속 꿀팁, I love you라는 말 대신 143으로 사랑을 표현했던 남편이 등장하는 꿈, 타워로 떠나는 날 트럭과 충돌사고가 날 뻔한 일, 타워 근처에서 살아있는 사슴을 먹고 있는 독수리를 본 일 등 이야기가 후반으로 치닫는 내내 이 모든 떡밥들은 치밀하고 철저하게 회수된다. 물론 이 영화의 매력이 사람을 끄는 이야기의 미학적 구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의 생과사를 철저히 극으로 몰고 가면서 관객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고, 많은 질문들을 던져 관객의 뇌에 경종을 울린다.
헌터와 베키가 B67타워에 올라갈 때부터 사다리를 연결하는 나사는 이미 헐겁고 빠지기 일보직전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계속 이어진다. 거의 다 빠진 나사는 심하게 흔들거리고 그리 세지 않은 바람에도 구조물이 덜컹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미터를 올라가야만 보이는 진실이 있고, 그렇게 해야만 마주할 수 있는 진실이 있다.
남편이 죽은 지 1년이 다 될 때까지 화장 분골을 열어보지 못했던 베키는 타워 위에 고립되고 나서야 남편과 친구 헌터가 불륜관계였음을 알게 된다.
밑으로 내려갈 사다리가 다 부서져 600미터 탑 위에서 그대로 죽게 될 와중에, 의지해야 할 상대가 죽은 남편의 불륜 상대이자 친구라는 잔인한 설정에 나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주인공은 자기에게 닥친 불행을 극복하고자 용기를 냈을 뿐인데, 그것이 결국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사지로 몰고 가는 걸 보면서 이거 완전 인생 그 자체네라는 생각에 온몸이 떨렸다.
내가 이 영화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베키 다리 상처의 피냄새를 맡고 공격하려는 독수리의 부리를 그녀가 낚아채서 모가지를 비틀어 잡아먹는 장면이었다. 실제 우리 삶에서도 우리 상처의 냄새를 정확히 맡고, 그 부분만 집중 공격하여 우리를 잠식시키려는 존재들이 있다. 그 존재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다. 주인공 베키는 오히려 그 존재를 죽여 잡아먹음으로써 살기 위한 에너지원으로 썼고, 그 힘으로 헌터의 시체를 뜯어먹는 독수리조차 삶을 향한 기세 어린 눈빛으로 쫓아버린다. 이 이야기에서 제일 연약하고 두려움이 많았던 주인공 베키가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적자'가 되는 순간, 모든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의 메시지는 '조연'인 댄과 베키의 '입'을 빌려 전달된다. "죽는 게 두렵다면 사는 걸 겁내지 마라, Life is too short, 인생은 순간이니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걸 하면서 살 것."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아 그 메시지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을 우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