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니엘에서 묶기로 하고 내가 계획한 일정 중 하나는 소마미술관에 가는 것이었다. 한국근현대미술전; 다시 보다(Re_SPECT) 전시를 예약해두기도 했었고, 지도를 찾아보니 미술관이 호텔에서 멀지 않았다. 나의 일반적인 목요일은 한 주의 중반을 넘어간 시점답게 에너지가 고갈될 때로 고갈된 상태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엔 회사가 아닌 곳에서 월화수를 보내서인지 (울고불고 감정소모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어렵고 힘든 업무를 한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가기 싫은 장소에서 보기 싫은 사람들을 보고 하기 싫은 일들을 한다는 그 자체 만으로 에너지 소모가 정녕 큰 것이었다... 눈 뜨자마자 조식이 아닌 한강 view를 과식하고, 호텔에서 준 마카롱과 커피를 집어 먹은 뒤 느릿느릿 움직였더니 미술관에 도착한 시간이 1시 30분 정도 되었다.
입구에서 티켓을 확인받는데 안내 직원이 2시부터 도슨트의 전시 설명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평일 오후 미술관에 있다는 것도 신나 죽겠는데, 기대치 않았던 도슨트의 설명까지 (참 오랜만에) 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도슨트 님을 기다리는 동안 어플을 깔고 오디오 가이드를 구입한 뒤, 1 전시실을 먼저 둘러보았다. 드디어 2시가 되고 도슨트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K-직장인인 내가 일부러 평일에 미술관에 온 이유는 조금은 한가하고 여유로운 전시 관람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는데 관람객이 생각보다 많아 깜짝 놀랐다. 난 이럴 때마다 정말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고 싶어 진다. 어떻게 돈을 버셨길래 평일 오후가 이럴 수 있으신가요? 비법 좀 알려주세요라고.
그런데 그 대답의 힌트 중 하나는 뜻밖에 도슨트의 말 한가운데에 있었다. 도슨트 님은 그림 자체에 대한 설명도 맛깔나셨지만 1시간가량 이어질 설명에 기대감을 주는 스토리텔러였다. 1 전시실에서 그녀는 BTS의 RM을 언급했다. 나는 BTS의 노래 한 곡을 모르고 있을 때도 RM은 알고 있었다. 랩몬스터라는 이름도 특이했지만내가 좋아하는 프로의 고정 출연진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지적호기심 때문에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었는데, 후에 그의 영어실력과 그가 미술애호가라는 사실에 내가 본명을 아는 몇 안 되는 현세대의 아이돌이 되었다. 도슨트 님은 RM이 이 전시를 오늘과 같은 목요일에 방문한 걸 보셨다고 했다. RM은 전시를 보고 나면 그 전시회에서 본인의 원픽 그림을 인스타에 업로드를 하며, 심지어 이 전시회의 그림 중 RM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그 두 개의 그림이 뭔지 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보러 왔다가 오늘 참 많은 걸 알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 그 그림들이 뭔지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전시 팜플랫에 따르면 이 전시는 서울올림픽 개최 35주년을 맞아 개최된 특별 기획전이다. 1920년대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미술의 전개 과정을 조망하는 자리. 80년대 초반생의 나는 호돌이 굿즈를 꽤 오랜 시간 소장 하고 있었다는 (미술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대적 연관성(?)이라도 있는데 저 시기에 태어나지도 않은 RM은 저 시대의 미술을 좋아하는 것도 모자라 소장까지 하고 있다는 것에 인간적으로 큰 질투감을 느꼈다.
제1세대 아이돌은 내가 10대의 한 복판인 시절에 등장했다. 아이돌의 팬인 적은 없었지만 나 역시 일반 10대처럼 그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고, 춤을 따라 췄으며, 아이돌 굿즈의 시초를 사기도 했었다. 한편 싱어송라이터 박진영의 앨범을 미친 듯이 들으며 전 곡을 외우다시피 할 때, 참여 뮤지션에 계속 등장하는 이름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방시혁 의장이었다.
아이돌과 자본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에 그 시절 나는 너무 평범한 10대였고, 지금도 엔터주가 오르는 시기와 원인을 잘 모르는 40대인 나는 제대로 현타가 왔다. RM의 음악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개인적인 노력과 음악성에 대해서 감히 논할 수 없지만, 노출되는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 내가 너무 원하는 것이기에 어린 나이에 그가 가진 자본의 힘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한국근현대미술전에서 RM의 원픽 그림은 제2 전시실에 전시된 이쾌대 화백의 자화상이었고, 그가 소장하여 이 전시에 대여한 그림은 제5전시실에 전시된 권진규 조각가의 달을 보는 기사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전시의 관람객 1인 나의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여성, 또 하나의 미술사' 제3 전시실 전체가 나의 원픽이었다. 나혜석, 천경자, 박래현이라는 아는 이름이 등장한 것도 반가웠지만 몰랐던 이성자, 방혜자, 최욱경이라는 새로운 여성 예술가를 만날 수 있어 더 좋았다. 그리고 실제 나는 이 전시실에 있는 작품들에게 시종일관 내 마음을 뺏기었다.
예술은 결국 내 눈으로 마주하고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내가 어떤 시기에 어떤 예술에 맥을 못 추는 지를 보면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다.
내 마음의 거울과도 같은 세 가지 그림 중 첫 번째는 천경자의 <초원 II>였다. 1970년대 중반이면 #여성, 혼자, 해외여행 자체가 상상이 안 되는 시절인데 이 그림은 작가가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나서 남긴 그림 중 하나라고 한다. 도슨트 님이 그림 속 코끼리 위에 벌거벗은 여인이 천경자 작가 자신이라는 설명을 해주셨다. 고개를 숙이고 우는 듯한 모습이 서글프게 느껴지면서도, 원시적 자연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동물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오늘의 내가, 내가 원하는 장소에, 나를, 그려 넣을 수 있다면딱 이렇게 그리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하는 그림이었다.
나의 두 번째 거울 그림은 이성자의 <어제와 내일>이었다. 작가는 가족과 헤어지고 프랑스에 건너가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의 붓질 하나하나에 그리운 자식들의 안위를 바라는 염원과 자신을 다 잡는 주문을 담았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이 그림을 쉬이 지나칠 수 없었다. 능력부족으로 아직 나는 엄마가 되지 못했지만, 저 슬픔과 그리움의 무게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경험이 있다. 붓질 하나하나에 그리움을 담았다니, 그림의 제목이 또 어제와 내일이라니 그림 앞에 선 순간부터 감정이 동요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림을 감상하다가 눈물이 맺혀 황급히 훔치기도 했는데, 이야기를 알고 작품을 대하는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먼 훗날 작가가 잘 자란 자식들을 만나고 나서 안도하여 화풍이 확 바뀌기도 했다는데 실제 이 그림 바로 옆에 전시된 그림이 그러했다. 한 예술가의 삶이 예술로 승화되어 나온 결과인 작품을 대할 때 평범한 관람객 1의 나는 항상 존경심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끼는 데, 나는 오늘 이 작품을 알게 되고 만나기 위해 이 전시회를 왔구나란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나의 세 번째 거울 그림은 최욱경의 <화난여인>이다. 도슨트 님이 최욱경 작가의 환희라는 그림 앞에서 그림을 설명할 때, 앞으로 추상화를 감상할 땐 제목을 보지 말고 그림을 보면서 그 제목을 추측하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해주셨다. 그 말씀이 인상적이어서 환희라는 작품 옆에 있는 다른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제목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그림의 제목은 "자화상"이었는데, 그림의 제목이 화난 여인이라는 것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는 하다 하다 그림에게도 내 마음을 들키는구나 싶었다. 실제 미술관을 찾기 전 나는 줄곧 화난 여인이었고, 미술관 밖을 나가고 나서도 얼마 간 더 화난 여인일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추상화는 내게 그저 난해하여 다가가기 힘든 영역이었는데, 이 그림을 보면서 추상화의 감상은 이렇게 출발하면 되겠구나 하는 힌트를 얻었다.
도슨트 님의 설명을 들으며 1시간 동안 전시를 예습하고 혼자서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2~3시간 정도 복습한 뒤, 전시에서 인상적인 작품의 굿즈를 사는 것(나의 오랜 버릇)을 끝으로 한국근현대미술전 감상의 대장정을 마쳤다. 행복함으로 충만해진 마음으로 소마미술관을 나와 계속 실실거리며 걷는데 미친 사람이 따로 없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내내 RM의 개인 앨범을 듣고 있는데 재킷 사진과 Yun이라는 첫 곡에서부터 art lover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언젠가 에픽하이의 fly를 듣고 가수의 꿈을 키웠다는 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데뷔 9년 차 개인 앨범 3번 트랙에서 그 에픽하이 타블로와 아티스트 대 아티스트로 어깨를 나란히 한 사실에 한 번 더 놀랬다. 그 시절 똑같은 노래를 좋다고 들은 나는 노래 가사대로 똑같은 방향뿐인 삶의 나침반을 따라가려고 쉴 새 없는 신세 타 타타타 타령만 하다가 화난 여인이 되었는데 말이다. 거기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 Honne와의 협업, 5번 트랙까지. 알면 알수록질투와 부러움을 넘어 이제는어질어질하기까지 하다.
많이 늦었을까, 하루라도 젊은지금부터라도타령만 하는 삶은 집어치우겠노라 다짐하며 나도 모르게 멋지다, 남준아. (극 중 동은이는 연진이에게 sarcasm이었지만, 나는 완전 진심이야.) 하며 소리 없는 박수를 치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근현대미술도 다시 보고, 뮤지션 RM도 다시 보게 되었다.
다시 봐서 (Re_SPECT) respect 하게 된 리스트가 늘어난 어느 연차의 하루. 조만간 나도 나 자신을 다시 보고, 나 스스로를 리스펙 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