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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24. 2023

프락치를 위한 후진 변명


 회사 후배 중에 S대 출신이 한 명 있다. 현재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전체 직원들 중 유일한 S대 졸업생이기도 하다. 승진 직전 말년 대리로 찌그러져 있을 때 나는 그녀와 같은 지점에서 함께 일했다. 그녀의 자리는 바로 내 옆자리였고, 일하는 동안 (내가 까이면 까였지) 일적으로 단 하나도 없는 깔 게 없는 그녀가 좋았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내가 언젠가 그녀에게 도대체 왜 여기에 다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표현은 안 했지만 (잘나고 똑똑한 네가 굳이 왜?라는)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듯 그녀는 웃으며 심플하게 대답했다.


경쟁이 싫어요.


 S대 입학과 졸업만으로도 그녀가 경쟁에 노출되었을 때, 어떤 스탠스로 노력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서울대는 못 갔지만) 가고 싶어 발버둥 쳤던 한 사람으로서 경쟁에 임했던 나의 자세, 경쟁의 한가운데서의 나의 모습도 떠올랐다.


 내가 원하는 건 고사하고 뭐를 위한 판인지도 모르면서 세상이 내세우는 줄 세우기에서 결코 지고 싶지는 않았던, 근데 그 와중에 능력은 부족해서 매몰차게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그렇게 점수와 성적에 연연한 한 아이는 대학 입학 후 완전히 고삐가 풀려 다소 극단적인 숨 고르기를 한다. 그러고 나서 그 시절 극한 경쟁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고시판에 스스로를 한 번 더 내몰고, 결국 무 한 조각 썰지 못하고 두 손 두 발 들고 나와 취직을 한다.


 후배처럼 똑 부러지게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돌이켜보니 나도 입사 이후부터 줄곧 나를 경쟁에서 배제시켜 왔다. 회사에 승진이라는 경쟁이 있긴 하지만, 그건 내가 의도치 않아도 타의에 의해 알아서 배제되었고 시건방지지만 붙어서 이기고 싶은 의욕도 애초에 없었다. 긴긴 시간, 회사와 조직생활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얼싸안고도 질기게 붙어있는 나에 대해 먹고사니즘 말고 더 갖다 붙일 것이 없었나? 했는데 걸출한 핑계 하나가 더 있었다.


경쟁에 대한 회피. 나도 후배처럼 경쟁이 싫었고, 그 안에서 정성 다해 휘둘리는 나 자신에게 지쳤다.


 그래서 나를 내몰지 않아도 밖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있는 편안한 환경, 고만고만한 욕심만 부리면 고만고만해질 결과가 명확한 안정성에 편승했다. 최근에 찐득한 감정들로부터 여기저기 얻어터졌을 때도 새삼 일에 감사함을 느꼈었다. 내 기분이 비록 사경을 헤맬지언정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 일의 난이도, 내가 100을 안 해도 월급이 나오는 이 원인과 결과가 어찌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참 기이한 건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성이 주는 그 등 따습고 배부름이 나를 몹시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두 눈 부릅뜨고 살아도 세상이 제대로 보일까 말까인데 반쪽도 제대로 안 뜨고 사는 기분, 조직의 논리(?)와 나의 깨똥철학은 대부분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가면 쓰고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 결국 전자의 이 나와 내 삶을 설명할 것 같은 기분, 이런 기분이 싫어서 바깥세상에 대한 정보를 기웃거릴수록 불안의 소스라침이 더 커지는 기분.






 0점은 무섭고 100점 맞을 자신은 없는 경쟁이 싫어 피하고 지냈다가, 이제는 하한선 상한선 있는 평균(?)의 삶이 공포스럽다 말하는 나. 그동안 너무 오래 푹 잘 쉬어서 다시 뛰어들어볼까 하는 에너지와 용기가 생긴 것일까.


 오늘의 내 위치에 대한 좌표를 찍고, 내가 원하는 것들을 죽죽 적어 내려가보았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경쟁이 난무하는 게임에서 승리해야 하는 것들이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거기였다며 다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피할 수 없는 건 결국에 끝장을 봐야 끝나나 보다.


 가성비 따져 계산하고 머리 굴려봤자, 어차피 사는 건 이러면 이런대로 힘들고 저러면 저런 대로 괴로운 거였다. 어차피 힘들고 괴로울 거라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느끼는 게 낫다는 명제를 이제는 두 팔 벌려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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