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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Jun 26. 2023

월급이 다가 아니라고 말해줘


 공짜로 일한 것도 아니고 노동의 대가로 월급 받았고, 그걸로 가족과 측근들에게 때때로 사람 구실했고, 적당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았으면 된 거지, 뭘 그렇게 따져?라고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표현은 좀 다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들어온 말이기도 하다)


 맞는 말이다, 지금 당장 회사 이름 찍힌 명함 없이 세상에 던져지면 내 이름 석자로 먹고살지도 못할 주제에 그냥 곱게 좀 다니지, 왜 그렇게 회사에서의 경험에 대한 이면을 파헤치려 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려 안달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럴 거였으면 그런 회사 가질 말았어야지 하는 소리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는데 말이다.


(공공기관) 직장인의 삶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서 고민 없이 뛰어든 것, 어 이거 아닌 거 같은데? 하면서 갈팡질팡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 이 모두 전적으로 내 잘못이지만 회사원으로서 산 13년 전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몇 년째 듣는 이 없는 구걸을 해왔다.


제발 월급 말고 뭐가 더 있다고 말해줘...라고






 사람을 키워내는 신성한 일이라도 했다면 이런 공허함이 덜 하지 않았을까 싶어 이 와중에 시집도 못 간 나 자신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입사 초에 재미 삼아 본 사주에서 거의 저주에 가까운 사주 풀이를 들었었는데, 난 이 회사를 다녀야 결혼을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사주 봐주시는 분의 어조가 상당히 단호하고 확신에 차있었기에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는 콧방귀 뀌며 웃어넘겼는데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것을 지령처럼 받들어 모신건지 아직 회사를 못 그만둔 게 설마 그거 때문인가 하는 우스운 생각도 해봤었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자꾸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부정하고 없는 만약을 상정하는 것, 이게 곧 정신병이지 싶어 13년의 세월 동안 월급 말고 내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게 얼마 전이다.


 다 똑같아, 다 그러고 살아 남들한텐 쉽게 되는 그 입장정리가 나는 왜 그리도 어려웠을까 하다가 주말 동안 도서관에 가서 책을 잔뜩 빌려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생각 저 생각 꼬리에 꼬리를 물다 문득 예전에 회사 후배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사회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대학 선배가 다른 선배들을 소개해 주겠다며 초대한 술자리가 있었다. 전부 유관기관에 다니고 있는 대학 선배들이었기에 알아 둬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당시 나는 동질감에 몹시 굶주려 있던 터였다. 촌스럽지만 학연으로 대동단결해서라도 나와 비슷(?)한 이들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때였다. 마침 재직 10년 만에 학교 후배까지 입사했기에 반가운 마음에 신입 후배까지 데리고 그 술자리에 참석했다. 학번 차이가 어마무시한 선배들임에도 첫 술자리는 기대만큼 친근하고 유쾌했다. 동문만이 할 수 있는 농담으로 순식간에 친근감과 유대감이 형성됐기 때문이었다. 그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져 두 번째 술자리도 금방 잡히었다.


 그리고 난 다시 만난 술자리에서 (동일인물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본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어린 후배를 이용하려는 선배를 보았고, 회식자리에서나 나올 법한 무례하고 싼 티 나는 농담을 후배에게 내뱉는 선배를 보았다. 나는 그날로 단체카톡방을 나왔고,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그 두 선배를 차단해 버렸다. 반면 사람 볼 줄 모르는 나 때문에 아무 죄 없이 술자리에 끌려온 회사 후배이자 학교 후배에게는 너무 창피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 날 회사 메신저로 후배에게 말을 걸어 그런 분들인지 몰랐고 괜히 너까지 끌어들여 그런 꼴 보게 해서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했다. 그런데 후배가 너무도 덤덤하게 괜찮다고 해서 나는 더 마음이 불편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내가 하도 걱정을 하니까 후배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


"그동안 선배 주변엔 다 좋은 사람만 있었나 보네요...? "


"어...?"


순간 나는 뭐에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당시 이미 입사 한 지 10년이 돼가고 있는 터라, 내 주변에 좋은 사람만 있었냐니 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고 앉았니라고 할 뻔했는데 후배의 말 뜻은 어제 그 선배들의 행동이 잘못되긴 했지만 사람들 다 그러는데 왜 그런 걸로 충격받으세요? 그거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회사 내부든 회사 외부든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판에서 오랜 시간 굴러먹은 어른 사람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에 대한 무감각과 한심할 정도의 나이브한 시선들로 인해 불과 1~2년 후에 내가 어떤 지옥과 후폭풍을 겪게 될지 그땐 아예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무지함과 무구함이 얼마나 견고한 건지 이 나이 먹도록 세상과 타인을 나 중심적으로 해석해서 여전히 발을 절고 깨지는 일 투성이지만.

 성인 인간과 조직권력에 대한 디폴트를 재정립할 수 있었던 건 분명 월급쟁이로서 겪은 세월과 경험 덕분이었다.


 회사를 안 다녔거나 긴 시간 버티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물고 늘어질 리도 없었을 테니, 지금 알고 있는 걸 지금도 몰랐다면 아마 몇 배로 더 멍들고 더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과는 절대 공정하게 싸우지 마라, 얘야. 그래서는 절대 정글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아서밀러, 세일즈맨의 죽음


 내 돈으로 수업료 내고 배우라 했으면 기웃거리지도 않았을 분야인데, 월급까지 받으며 체험했으니 다행히도(?) 월급 말고 뭐가 더 있긴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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