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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Sep 16. 2023

나는 방황할 권리가 있다

마흔의 방황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는 4번의 아홉수가 지나갔다.

아홉 살에는 그저 무럭무럭 자란다는 기쁨만 있었던 건지 별다른 기억이 없는데, 한국나이 열아홉 살, 스물아홉 살, 서른아홉 살에는 시절마다 인생의 변곡점이 있었다.

정작 그 한가운데에 있었을 때는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도 모르고 지나갔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 돌아보니 그 굴곡의 전환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그 변곡점은 유서 깊은 내 방황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빠른 83년생인 나는 열아홉 살에 대학생이 되었다. 어쩌면 진짜 공부가 시작되어야 할 그때 책 한자를 읽지 않고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괴로운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흥에 겨워 술을 마셔댔다. 빡칠 때 술을 찾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인과관계의 음주였다. 가진 건 시간과 체력이 전부고 주체할 수 없던 열기가 식을 줄 몰랐던 때, 술이 아닌 다른 걸로도 얼마든지 풀 수 있었을 테지만 스물을 맞이하는 당시 내 태도는 "취권"이었다.


그때의 수련으로 학점과 건강을 제물로 바친 대신 수확(?)도 꽤 있었다.

나와 타인의 주사, 내가 소주보다 맥주에 강하다는 것, 과도한 음주와 심한 구토는 눈의 실핏줄을 터지게 하고 종국에 내장기관의 녹색 빛깔 내용물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 술은 사람을 빛의 속도로 가까워지게 하지만 빛의 속도로 멀어지게도 한다는 것 등등을 배웠다.


 그리고 그 어떤 계산과 간섭 없이 술 마시고 놀 수 있었던 때는 인생에서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두절미하게 이젠 그러고 싶어도 간이 받쳐주질 않고, 출근과 기타 나의 일상에 끼칠 후폭풍을 염두하다 보면 어느새 술맛이 떨어진다. 그래서 가끔 인생의 장엄한 목표와 방향은 온 데 간 데 없고, 술 취해서 꽐라 되는 것만이 내 세상이었던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뒤늦게 취업 행렬에 합류한 나는 스물아홉에 직장인 2년 차가 되었다. 글로 배운 세상과 사람이 실제 현실과 얼마나 다른지 본격적으로 체험하며 소스라치던 때였다. 세상에는 야비하고 비열한 어른들이 넘쳐났는데 희한하게 그들이 더 떵떵거리는 납득불가의 세계관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숨만 쉬어도 돈인 세상이고, 내가 취업을 한 이유도 결국 돈이라 그랬는지 회사 안에서든 밖에서든 사람과 돈이 엮이는 상황을 자주 마주하게 되었던 때도 그때다.

사람이 돈 앞에서 어느 정도까지 추해지고, 얼마나 쉽게 바닥을 드러내는지 보면서 돈의 무서움을 느꼈다. 인격과 성품은 각자의 몫으로 맡기고 돈만 놓고 따지면 돈이 없는 사람이 비루해질 확률은 압도적이었다. 나는 이런 걸 보는 게 무척 힘들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저 상황에 몰지 말아야겠다는 결심과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이 적절하게 섞여 회사를 박차고 뛰쳐나가고픈 나를 매번 멈춰 세웠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업무에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나는 왜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할까?라고 나 자신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월급뽕 맞은 좀비지 뭐겠니 라는 심드렁했던 대답에 이제야 디테일 한 스푼을 추가해 본다. 철밥통에 발 한 짝 걸쳐놓고, 다른 발로는 온갖 것에 좌충우돌하고 싶어라는 문장으로 정리되었다. 하필 입사 초반에 세상의 룰을 눈치채 버린 바람에 그리 됐다는 핑계도 덧붙인다. 회사에 다니면 방황이 취미이자 특기라고 위풍당당하게 말하면서도, 그러니 저러고 살지라는 속세의 손가락질도 피할 수 있다 믿으며 직장 생활을 이어온 게 어언 14년째다.






 서른아홉 살 나는 상실에 허우적거렸고 그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랑이 뭔지 잘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 없는 두 존재를 삼십 대에 잃었다.

그 소중한 존재가 곁에 있을 때 나는 사랑할 줄 몰랐고, 사랑받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사랑하는 대상이 떠나려 할 때,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언제 어떻게 왜 보내줘야 하는지를 몰랐다.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그리워하고, 그리움에 사무쳐 한참 울다보며 아 맞다 영원한 헤어짐이었지를 깨닫는다.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한 존재들이기에 그들의 부재는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한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정도로 엄격하고 단호한 나에게 그 어떤 머뭇거림, 모호함, 흐리멍덩함, 알 수 없음이 발견되기 시작한 건 순전히 그들 때문이었다. 결코 변할 없는 뭉근한 애정, 찌르지 않아도 줄줄 새 나오는 눈물이 내 안에 가득하다는 것도 그들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흔이 된 지금, 여전히 안정된 건 하나도 없고 확실한 건 하나도 없다. 예전과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미처 다 쓰지 못한) 무수한 방황들이 경력이 되어 맨땅에 헤딩하는 건 아니라는 정도다.


 내가 기대했던 스무 살, 서른 살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실제 내 이십 대와 십 대는 늘 삑사리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 경험을 두어 번 하고 나서부터 나는 내 마흔에 대해 상상하는 걸 그만두었다.


아 내 마흔은 이런 모양새구나, 나는 여기서부터 내 속도대로 나의 사십 대를 출발하면 되겠구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4번의 아홉수를 거치고 나서야 터득한 작고도 귀한 지혜라 하겠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 때처럼 무모하게 덤비지도  않지만, 가지고 있는 게 하나같이 다 애매해서 갈팡질팡하는 게 더 많아진 내 나이 마흔.


여전히 들끓는 점이 낮은 나는 더 심한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한다. 사십 대의 끝에는 또 다른 내가 서있을 것이고, 마흔은 불혹이 아니고 여전히 방황의 특권을 가진 나이라 믿고 싶다.


40년 track에 어울리는 노래도 발견했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나대로 가고 멈추고 풀었네
세상은 어떻게든 나를 화나게 하고
당연한 고독 속에 살게 해
Hey you don't forget
고독하게 만들어 널 다그쳐 살아가

ㅡ이소라, Track 9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

3분 남짓한 음악을 들으며 나는 한 편의 시를 읽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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